이따금 평생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을 때가 있다.
이따금 평생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을 때가 있다. 몇 년째 서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판촉물 포스트잇들을 버리기 망설일 때 아빠를 떠올린다. 쓰지도 않는 물건을 버리지 못해 꽁꽁 쌓아두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갔던 놀이동산 푸드트럭의 비싼 가격에 놀라 "우리 이거 하나만 사서 나눠 먹을까?"라고 말할 땐 엄마를 떠올린다. 하나 사서 언니와 나눠 먹으라는 엄마를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코 아빠와 엄마를 닮아버렸다.
내 부모님은 가난한 집의 막둥이였다. 시골 촌구석에서 형제들에게 치이면서도 공부는 잘해서 번듯한 직장을 구했다. 그런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살림을 차렸을 때 그들에게 남은 건 "아껴야 산다."라는 마음가짐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아빠는 비지떡이든 아니든 간에 값이 싼 물건만 찾았다. 비지떡 같은 물건들은 금세 망가지곤 했는데, 그러면 아빠는 공대생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어거지로 고쳐 써 버릇했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싸고, 망가졌음에도, 작동은 잘 돼서 오래 쓰고 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엄마는 언니만 영어학원에 보내주었다. 언니가 학원에 가면 혼자 남은 나는 엄마한테 영어를 배웠다. 엄마는 언니가 풀어놓은 문제집을 일일이 지우개로 지워 그걸로 나를 가르쳤다. 문제집 표지에는 언니의 이름이 네임펜으로 쓰여 있었고, 모든 페이지에 희끗한 연필자국이 남아있었다. 바야흐로 언니가 입던 속옷도 모질라 문제집까지 물려받아야 했던 날들이었다. 그 시절은 나로 하여금 증정품처럼 느껴지게 했다. 언니를 낳았더니 원플러스 원으로 딸려온 것 같은, 말하자면 덤 같은 존재. 어린 마음엔 그게 너무 슬펐다. 언니가 풀던 문제집을 풀어야 한다는 게, 내 것을 갖지 못한다는 게 서러웠다. 20년쯤 지난 지금은..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엄마가 안쓰러워서 서글프다.
슬픈 일화를 말하니 10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시장 바닥에서 생선을 팔아 홀로 세 남매를 키워낸 무척이나 과묵한 분이셨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세뱃돈을 주실 때마다 "피 같은 돈을 왜 손녀들에게 주시냐"라며 말렸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기어코 내 호주머니에 만 원을 넣어주셨다. 나는 호주머니 속 구겨진 만 원을 매만지며 '외할머니의 피 같은 돈'이라는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외할머니가 어디에서 어떻게 돈을 버셨는지 상상조차 못 했으면서 그 말만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콕콕 쑤셔왔다. 그 돈을 결국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돈은 도무지 쓸 수가 없다고 느꼈던 것만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짠순이, 짠돌이가 허리띠를 바짝 졸라 매어 도달한 중산층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도시 한 구석에서 언니와 친구들에게 치이면서도 공부는 열심히 해서 번듯한 직장을 구했다. 짠순이, 짠돌이가 몇 십 년 간 "아껴야 산다."는 마음으로 모았을 큰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내 곁을 떠났을 때, 내게 남은 건 "이걸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길 때마다 의식적으로 엄마, 아빠를 떠올린다. 테슬라가 너무 사고 싶어도 차를 좋아하던 아빠가 생전에 단 한 번도 새 차를 산 적 없이 중고차 시장만을 전전했던 것을 떠올리면 들끓던 허세가 차갑게 식는다. 친구들이 하나씩 갖고 있는 명품 가방이 좋아 보여도 엄마가 40만 원짜리 가방을 사며 한참을 고민했던 것을 떠올리면 마음이 쓰려온다. 내 부모가 남겨준 피 같은 돈은 도무지 쓸 수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따금 평생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을 때가 있다. 50대가 되어서야 넉넉해진 인심에 "비싸도 사라."라고 센척하며 말하지만 막상 싼 걸 찾는 습관이 발동해 버리는 아빠를 떠올린다. "비싸도 좋은 걸 사야 한다."라고 신신당부하면서도 중고시장에서 사 온 점퍼를 신나서 자랑하던 엄마를 떠올린다. 당신들 덕분에 넉넉히 비싸도 좋은 걸 살 수 있게 되었으면서도, 기어코 당신들의 그늘 아래로 기어들어 가는 내가 나는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