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 씨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경애 씨는 웬만해선 틀리지 않았다.
내 엄마 경애 씨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헌신적이고, 편안함을 주고.. 온갖 형용사들과 어울리는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 '지혜로운'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나는 그런 경애 씨를 존경했다.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
경애 씨가 자주 하던 말이다. 잔소리를 끝내고 돌림 노래처럼 하던 말. 그 말을 믿지 않았던 10대의 유진이는 먼저 나서서 "엄마 말을 들으면 콩고물이 마구 떨어지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20대가 되었다. 수많은 경험적 증거에 의한 귀납적 추론이랄까?
경애 씨는 웬만해선 틀리지 않았다. 대학 입시 때다. A대학교 면접장을 나오자마자 면접 문제와 내가 했던 답변을 말했다. 경애 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불안하다. 안 될 것 같다."라고 했다. 나는 꽤나 옳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B대학교 면접장을 나왔을 때는 "잘했네. 될 것 같다."라고 했다. 나는 떨어질 것 같아서 울고불고했는데도 말이다. 결과는 경애 씨가 짐작한 대로였다.
경애 씨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때다. 공부 시간을 아무리 늘려도 불안함이 잦아들지 않았다. 똑똑한 친구들을 보며 '난 왜 이렇게 느리지?' 자책했던 날들이었다. 흔들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경애 씨가 한 마디 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엄마 믿고 지금처럼만 해라." 불안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 말을 상기했다. '엄마가 말했으니까 진짜다.' 하며 버텼다. 결과는 경애 씨가 확언한 대로였다.
경애 씨를 떠나보낸 지 4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따르지 못하고 있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가슴 깊이 박혀서 두고두고 떠오른다. 아, 지켜야 하는데. 자다가도 떡이 생길 텐데.
경애 씨는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언니와 나에게 말했다.
"아기는 꼭 낳아라."
언니는 답했다. "난 절대 결혼 안 해."
나는 물었다. "왜? 아기 낳으면 힘들잖아."
그러자 경애 씨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너희를 낳아서 이렇게 같이 밥을 먹고, 추억을 쌓잖아. 엄마는 너희가 있어서 너무 좋아."
그 말을 하던 경애 씨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경애 씨는 늘 방긋 웃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특히 더 방긋 웃었다.
어느새 경애 씨가 강락씨와 결혼했던 28살이 되었다. 하지만 아기도, 그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결혼도 막막하기만 하다. 경애 씨가 옆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엄마, 아기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던데. 엄마 없이 그게 될까? 부장님께 들었는데 시댁 부모님께 아기 봐달라고 부탁하기도 눈치 보인대. 아기가 있으면 아빠가 좋아할 텐데. 언니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테니 내가 해야 할 텐데. 나 같이 이기적인 애가 엄마처럼 희생할 수 있을까?"
경애 씨는 뭐라고 답했을까. 오직 경애 씨한테서만 나올 수 있는 정답이 있을 텐데.
2016년, 거짓말로 고민했던 날들이 있었다.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상대의 거짓말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다 못 참고 경애 씨에게 털어놓았다.
"엄마, 친한 친구가 자꾸 거짓말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바보같이 그걸 또 들켜. 그래서 너무 힘들어."
그러자 경애 씨는 말했다.
"그냥 믿어줘."
가슴이 덜그럭 했다. 예상 범주 안에 있던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엥? 그냥 믿어주라고?"
"걔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눈 딱 감고 믿어줘. 그런다고 네가 바보가 되지 않아."
경애 씨는 웬만해선 틀리지 않는다. 그 말도 분명 맞을 것이다. 아는데도 따르기가 어렵다. 거짓말을 들으면 경애 씨의 말을 떠올린다. 그냥 믿어주자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하지만 쉽지 않다. 경애 씨가 옆에 있다면 묻고 싶다.
"엄마, 나는 언제쯤 넓은 마음을 갖게 될까? 완전무결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나조차도 완벽하지 않으면서 왜 거짓말만 들으면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을까?"
경애 씨는 뭐라고 답했을까. 경애 씨라면 분명 혜안을 줬을 텐데.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아기는 꼭 낳아라. 거짓말을 하더라도 믿어줘라. 꼭 따르고 싶은 말. 그러나 쉽지 않은 말.
사랑하는 경애 씨, 지켜보고 있죠? 결국 좋은 쪽으로 흘러가도록 도와줄 거죠? 설에 가고 못 가봤네. 4월이 가기 전에 한 번 갈게요. 엄마를 닮은 예쁜 꽃을 들고. 오늘도 보고 싶어요.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