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히사이시 조
2000년대 초반이었을까. 내 엄마는 이따금 손에 천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며 말했다.
"언니랑 비디오 방 가서 제일 보고 싶은 거 하나씩 빌려와."
그러면 언니와 나는 손을 잡고 비디오 방으로 향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좋은 자매가 되었다.
비디오 방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비디오가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오색찬란 화려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플라스틱 통에 담겨있었다. 어서 나를 고르라고, 난 꽤나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떠한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내 비디오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또 이거 빌려왔어?"라고 말할 게 뻔하지만. 보고 또 봐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센이었다.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는 푸른색 비디오. 나는 그걸 센이라고 불렀다. 뒤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라 외울 수 없었다. 엄마에게 제목에 있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이해가 되진 않았다.
9살 유진이는 센을 도와주는 단발머리 남자애가 나오는 장면을 가장 좋아했다. 맨날 나를 괴롭히는 검도 학원 임현수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그 단발머리가 우리 반으로 전학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허연 괴물이 나오면 무서워했다. 괴물이 나오면 여지없이 엄마를 찾았다. 괴물이 나왔다고, 괴물이 끝나면 알려달라고. 그러고 나서는 엄마가 내 어깨를 툭 건드릴 때까지 귀와 눈을 막았다.
센이 다시 엄마와 아빠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그랬다.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센의 엄마와 아빠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보통의 어린이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음악은 그냥 듣고 넘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의 어린이가 아니었다. 한 놈만 패는 어린이었다. 하도 영화를 많이 돌려보다 보니 그 어린 나이에도 음악에 관심이 닿았다. 특히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고 느껴지는 음악이 있었다. 그건 영화 엔딩 크레딧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었다. 까닭 없이 먹먹함을 느끼게 하는 그 음악. 일본어 가사인 탓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흥얼흥얼 따라 부르게 하는 그 음악. 언니가 이제 끝났으니까 자기 거 볼 차례라고 소파에서 밀어내도 기어코 자리를 내어주지 않게 만들었던 그 음악.
그때는 몰랐다.
그 묘한 음악이 히사이시 조의 <언제나 몇 번이라도> 였다는 것을.
그 어려운 영화 이름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봤던 그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더없이 순수하고 더없이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
어떻게 하면 엄마가 시장에 파는 떡볶이를 사줄까 궁리하는 것이 하루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날들.
언니 인라인스케이트를 몰래 신고 나갔다가 딱 걸려서 엉엉 울었던 날들.
언니와 한 침대에 누워 시끄럽게 웃고 떠들다 아빠한테 혼났던 밤들.
언제나 몇 번이라도 계속될 것 같던 그 시절.
센을 보면, 그 묘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들으면 잠시나마 9살로 돌아간다.
9살이 되고는 한다.
언제나. 몇 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