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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Apr 27. 2024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영화 이수(Goodbye Again) 속 한 장면

프랑수아즈 사강이 24세 때 쓴 프랑스 소설

24살이 어떻게 39살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2번의 결혼과 이혼, 마약, 도박, 알코올 중독

제목은 음악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가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조롱이라고 볼 수 있음. (브람스 전기 작가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대중으로 하여금 브람스에게 흥미를 갖게 만드는 건 거의 절망적인 시도라고 한다.)

브람스 역시 14살 연상이었던 여자를 평생 마음에 품었다.

사랑은 2년이상 가지 않는다고 말함.

물음표가 아닌 점 세 개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함.


주인공의 내면의 심리상태를 상세히 기술했다.

요즘 나오는 도파민 뿜뿜 스토리들의 원형. 그래서 그런지 익숙한 스토리 전개.

그러나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가 전체적으로 자세히 드러나서 좋았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모든 인물의 심리를 자세히 기술. 



시몽-폴

p.43 그녀는 그를 놀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심함과 대담함, 때로는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진지함과 즉흥성의 결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신비로운 태도와 나직한 어조로 "모르겠어요."라고 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전반적으로 무관심해진 게 언제부터인 것 같아요?"


p.46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p.59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p.60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슬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p.87 혹시 어리석게도 그가 그들 사이에 일어날 첫 번째 사건이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것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면 스스로를 탓해야 하리라. 그에게는 끈질긴 인내심과 넘치는 애정, 그리고 물론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는 자신에게 그런 인내심과 애정이 있다는 것, 자신 앞에 긴 인생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단계일 뿐, 흔히 예상하는 익숙한 결말은 아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는 수많은 낮과 밤이 펼쳐져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는 그녀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한 욕망을 느꼈다.


p.141 그런 다음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이마를 쓸어 주고는 평소와는 달리 자기 어깨의 우묵한 곳에 그녀의 머리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제 자.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의 어깨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는 스스로의 단호함에 대해 자부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폴-로제

p.11 그녀는 로제에게 설명할 수 없으리라. 자신이 지쳤다는 것,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유는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 아니던가. 자신이 그가 몹시 싫어하는 악착스럽고 독점욕 강한 여자가 된 것 같다는 말을 그녀는 그에게 할 수 없으리라.


p.18 로제는 자기 집 앞에 차를 세워 놓고 오랫동안 걸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조금씩 보폭을 넓혔다. 기분이 몹시 좋았다. 폴을 만날 때마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오늘 밤 그녀 곁을 떠나면서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뭐라고 말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자신에게 막연하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엇이라는 건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없는 것, 그가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당연히 그녀 곁에 머물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여자를 안심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걷고 싶었고, 거리를 가로지르고 싶었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싶었다. 보도 위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 싶었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이 도시를 살펴보고 싶었으며, 그러다가 어쩌면 늦은 밤의 어떤 기회를 포착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강둑 끝의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p.19 그는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한 다음 자리를 떴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그가 그녀를 혼자 자게 내버려 두는 일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었다. 아파트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소지품을 꼼꼼하게 정돈한 다음 침대 위에 앉았다.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 밤도 혼자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그녀에게는, 사람이 잔 흔적이 없는 침대 속에서, 오랜 병이라도 앓은 것처럼 무기력한 평온 속에서 보내야 하는 외로운 밤들의 긴 연속처럼 여겨졌다. 침대 속에서 그녀는 마치 누군가의 따뜻한 옆구리를 만질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본능적으로 한쪽 팔을 뻗었고... 남자든 아이든, 누구든 상관 없었다. 로제는, 아마도, 가끔은 그녀를 필요로 하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잠들고 깨는 데 필요하다거나 열정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만 필요로 할 뿐임을 그녀는 때때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가슴 아프게 고독을 되씹었다.


p.97 차 안에서 로제와 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폴은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즐기고 있던 파티에서 그녀를 끌어냈다면 적어도 어떤 설명이나 구실이 있어야 하리라. 로제는 그녀의 집 앞에서 차를 세우긴 했지만, 시동을 끄지는 않았다....... 순간 그녀는 로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 자기 집까지 올라오지 않으리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그가 기득권자로서 갖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취한 조심스런 행동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폴은 차에서 내린 다음 나직하게 "잘 가."라고 인사하고는 길을 건넜다. 로제는 즉각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p.136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서글펐다 폴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랬다, 그녀에겐 그가 필요했다. 인색하게 겨우 열흘 동안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는 대신 완벽하게 자신을 보호해 주었으면 싶었다. 그는 모든 것에, 심지어 남자의 이기심에도 한계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p.144 폴의 마음속에서 시몽이 로제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때는 바로 그가 두 사람의 관계를 명백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도록 그녀에게 요구하는 그런 순간들이었다. 그녀로서는 그들의 관계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유보적인 태도에 신물이 났다. 다만 혼자 있을 때면 로제가 그녀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오류처럼 여겨졌고, 그들이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공포에 가까운 느낌으로 자문했다. '그들'이나 '우리'는 언제나 로제와 그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시몽은 '그'가 아니었던가. 로제는 이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 현재의 생활에 진력이 나면 그는 그녀에게 와서 불평을 늘어놓고 그녀를 되찾으려 하리라. 그리고 아마도 성공하리라. 시몽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테고, 그녀 자신은 또다시 고독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면서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들을 입게 되리라. 그녀는 자신의 숙명, 이 모든 것을 피하려고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 그 느낌, 그녀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곧 로제라는 생각에 저항했다.



 

 우리는 모두 시몽이었다. 폴이었고 로제였다. 

시몽과 같이 앞 뒤 가리지 않고 무의미한 희망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폴과 같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사랑을 불가항력적으로 지속했다.

로제와 같이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연애를 했다.


 시몽이었다가 폴이었다가 로제가 된 적이 있다. 모두 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였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로제였다가 시몽이었다가 폴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리석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불쌍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적이었다. 6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허락하는 것.


 '우리'라는 말은 너와 나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너와 나 말고는 우리라는 낱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라는 낱말은 너와 나로만 구성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너를 절대로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하고 나서도, 내 사랑은 완전히 끝이 났다고 확신이 들고나서도, 몇 개의 계절들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저항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폴이 로제에게 느끼는 '우리'라는 감정은 저항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저항했다. 우리를 지웠다. 아무리 지우개에 힘을 주어 빡빡 지워도 연필 자국이 남는 것처럼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다. 나는 저항했다. 그리고 너도 이제는 그랬으리라 믿는다. 이따금 안부를 묻지만. 이따금 전화를 걸어오지만. 지난 일이 되어 가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기침같은 것이리라.  


 경제환의 <제자리로>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모든 건 다 제자리로, 어쩌면 더 좋을지도."

그 가사를 들을 때면 생각한다. 제 자리는 어디일까. 어쩌면 더 좋을지도 모르는 제 자리는 어디일까. 사람에게 정해진 자리라는 게 있을까. 하늘에서 정해진 제 자리라는 게 있는 걸까. 그렇다면 폴의 제 자리는 어디였을까. 시몽이 아니라 로제였던 것일까. 그녀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나의 제 자리는 어디일까. 


 시몽이 되기 힘든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시몽이 되기를 기대하기도 힘든 나이가 되었다. 시몽이 아니라면 로제가 되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폴이 되어야 할까. 로제가 될 바엔. 폴이 될 바엔.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 시몽이 되지 않을 바엔.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시몽이 되자. 시몽이 되어야겠다. 아무리 힘들어도 말이다. 적어도 제 자리에서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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