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 도쿄필하모닉 내한공연 관람 후기
정명훈 지휘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보고 왔다. 세종문화회관이었다. 광화문 거리 한 복판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은 그 위치와 잘 어울렸다. 이런 표현 식상하지만, 화려하면서도 수수한 건축물이었다. 얼핏 봐도 우리나라를 잘 녹여낸 것 같았다. 수수함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정명훈 씨는 언뜻 들어보기는 했으나 잘 알지는 못 했다. 유명한 지휘자라는 것. 70대 할아버지라는 것.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공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웬 유명한 할아버지가 나오는구나 정도였다.
티켓 가격은 17만 원이었다. 2시간에 17만 원이라니. 내 기준엔 아주 비싼 공연이었다. 이렇게까지 계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티 내고 싶진 않지만, '1분에 1400원짜리구나' 하는 계산이 절로 들었다. 대단한 공연이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세종문화회관 1층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벚꽃 시즌의 석촌호수만큼 복작복작했다. 그런데 석촌호수와는 달리 연령대가 높았다. 절반 이상이 50대 이상인 것 같았다. 평일 저녁에, 저렇게 연세 많은 분들을, 이다지도 정신없는 광화문까지 대동하게 만들다니. 뭐가 있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홀 안으로 입장했다. 3층짜리 홀 안에 좌석이 수천 개는 되는 듯했다. 조명도 아주 많았다. 고개를 들어 구조를 살피면 조명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빨간색과 짙은 갈색을 주 색깔로 하는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는 홀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웠다. 넓은 공간 속 수천 개의 좌석, 수백 개의 조명,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10분 후 시작될 공연의 위용을 미리 알려주는 듯했다.
2시간의 오케스트라 연주 동안 나는 자꾸만 마스크를 고쳐 써야 했다. 자꾸만 입이 O자 모양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촌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아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서도 애써 입을 다물었다.
건축물보다, 비싼 티켓 보다, 많은 사람들보다, 고급스러운 홀보다 나를 압도한 것은. 지휘였다. 웬 유명한 할아버지의 지휘였다. 족히 100명은 될 법한 단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70대 할아버지의 손 끝에만 시선이 머물렀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팔을 공중에 휘저은 것뿐이었다. 움직임이 크거나 과격하지도 않았다. 튀지도 않았다. 그저 살랑살랑. 나비가 추는 춤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우아함 속에 단호함이 느껴졌달까. 이전에 봤던 30대 지휘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몸짓이었다.
70살이 저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70살이 저렇게 섹시할 수 있다니. 한 분야에 정통하다는 건 저런 거구나. 두 시간 동안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나이밖에 없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무슨 상을 받았는지 찾아볼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그가 덕후라는 것을. 음악 덕후. 지휘 덕후.
그의 70년 세월을 감히 상상했다. 겨우 손 끝만 보고. 어떤 시간을 보냈던 걸까.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저렇게 나이들 수 있다면,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젊음의 싱그러움보다 나이 든 숙련공의 원숙함이 더 매력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눈과 귀로 배웠다.
팸플릿에서 그의 사진이 나온 쪽을 손으로 살짝 찢었다. 그러고는 거울에 붙였다. 흰 머리에 주름이 가득 패인 그의 얼굴을 보며 다짐한다. 저렇게 늙어야지. 섹시한 할머니가 되어야지. 앞으로 남은 40년을 그렇게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