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가 필요하다. 아무 데서나 파는 그렇고 그런 보자기 말고 마법의 보자기가 필요하다. 그 보자기에는 공기를 담을 것이다. 내가 아끼는 공기들을 꾹꾹 눌러 담을 것이다. 그리고는 보자기의 끄트머리를 하나로 모아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묶을 것이다. 조금도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조금의 틈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5월의 아침에만 느껴지는 공기가 있다. 같은 날이라도 밤에 느껴지는 공기와는 다르다. 잠자리에 들 때 창문을 열어놓으면, 아침 알람 소리를 듣고 깨어나는 동시에 그 공기를 느낄 수 있다. 쌀쌀하면서도 쾌청한 공기. 연두색 가루가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걸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놀이터. 모래성. 어린이날. 그리고 엄마. 그런 것들이 떠오르는 5월의 아침 공기가 있다.
고등학교 등굣길에 맡았던 들꽃 향기가 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고등학생 어진이는 10분만 빨리 일어나면 땀 흘리지 않는 뽀송한 등교를 할 수 있는데 매번 그걸 실패했다. 오늘도 늦잠.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학교를 향해 뛰었다. 30분이 걸리는 등굣길을 20분으로 단축시킨다는 일념 하나로 질주했다. 그렇게 학교로 뛰어가는 길에는 '꽃길'이 있었다. 정식 명칭이 된 것은 나중 일이고, 동네 사람들끼리 먼저 꽃길이라고 이름 붙인 길이다. 꽃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는 들꽃이 그득했다. 그것들은 은근한 향기를 풍겼다. 꽃집에서 맡을 수 있는 화려한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은은하게 공기 중으로 퍼지는 그 내음. '내일은 일찍 일어나리라.' 다짐하던 그 땀나는 등굣길에서만 맡을 수 있던 들꽃 향기가 있다.
한여름 장마기간에 맡을 수 있는 비냄새가 있다. 그 냄새는 어찌나 힘이 센지, 비 오는 날이라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작은 창으로 새어 들어온다. 그리고는 기억 저 편에서 소멸되어 가던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복잡한 교우관계 속 14살 유진이가 느꼈던 소외감이나, 절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던 사람이 건넨 우산 같은 것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 쓸데없이 그런 것들을 오늘로 데리고 온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중독적이라 한 번 더 코를 킁킁하게 만든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빗물이 흙에 닿으며 탄생하는 비릿한 냄새. 지겹도록 이어지는 한여름 장마기간의 비냄새가 있다.
S병원 암병동 10층에 위치한 6인실의 병실. 그 10평 남짓한 공간에 환자 6명과 보호자 6명. 총 12명이 커튼을 사이에 두고 오밀조밀 모였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어떤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진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녹색 커튼 사이로 6명의 기침소리를 듣는다. 6명의 가래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6명의 아픔과, 괴로움과, 슬픔을 듣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어지는 6명의 안쓰러움도 듣는다. 6명의 걱정을 듣고, 사랑도 듣는다.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녹색 커튼을 사이에 두고.
보자기가 필요하다. 아무 데서나 파는 그렇고 그런 보자기 말고 마법의 보자기가 필요하다. 그 보자기에 5월의 아침공기와, 10년 전 등굣길의 들꽃 향기와, 장마기간의 비냄새를 꾹꾹 눌러 담을 것이다. 그리고는 보자기의 끄트머리를 하나로 모아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묶을 것이다. 조금도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조금의 틈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안아 들고 S병원 암병동 10층 6인실로 갈 것이다. 6인실 중앙에 보자기를 내려놓고 문이라는 문은 모두 닫을 것이다. 창문과 화장실 문, 출입문을 가리지 않는다. 응축된 그것들이 조금도 새어나가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다음은 우리를 가르는 길고 커다란 녹색 커튼을 걷고, 6명의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병실을 오고 갈때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혹시나 내 시선이 불편할까, 애써 바닥만 보며 걸었지만 그날만큼은 용기를 낼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보자기를 풀 차례다. 절대 풀리지 않을 그 매듭은 그 공간에서우리들에게 둘러싸여 정성껏, 하나씩 풀어질 것이다.
보자기 속 공기는 6인실 병실을 서서히 그리고 가득히 채워 나갈 것이다. 6명의 코를 거쳐, 기관지를 거쳐, 폐 속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6명의 떨어진 산소포화도 수치를 높여줄 것이다. 기침과 가래를 줄여줄 것이다. 병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꼭 그럴 것이다.
오늘도 나는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녹색 커튼을 사이에 두고 6명의 기침과 아픔을 듣는다. 6명의 안쓰러움과 사랑을 듣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지금 보자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