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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May 26. 2024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 사약

1.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다.


책은 자기 말만 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책을 읽는다.

위가 따끔거리는 게 느껴지지만 커피를 마신다.

다른 방법은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카톡.

친구가 묻는다.

"뭔데.

제발 만나서 고민을 공유해 줘.

맨날 나만 모른 채 흘러간다고."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답장을 한다.

하늘색 배경을 채워가는

노란색 말풍선들을 본다.


아무 일이 일어난다.

내 현실이다.


잠시 생각.

노란색 말풍선을 꾹 눌러

삭제한다.


다시 노란색 말풍선을 채운다.

"다음에 좀 괜찮아지면 말할게."






한 입만 먹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한 입만 먹을 거면 아예 안 먹어야 하고,

한 입이라도 먹고 싶으면 한 그릇을 통째로 다 먹어야 한다.


한 번만 우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한 번만 울 거면 아예 안 울어야 하고,

한 번이라도 울고 싶으면 영영 울어버려야 한다.


영영 울 작정으로 울었던 적이 있다.

바뀌는 것이 없었다.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영영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울면 영원히 그칠 수 없다고 직감했다.

영영 울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아무 일이 일어날 뻔했고

한 번 울 뻔했고

영영 울 뻔했다.


황급히 책을 펼친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것을 읽고

그것을 듣는다.


책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다.





 



2. 사약


지옥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오후에 마신 커피 때문인가. 

알고 있었다. 

지금 마시면 밤에 잠들지 못할 텐데.

알면서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지옥이다.

위가 아프다.

세 잔 이상 커피를 마시면 위가 따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목으로 흘려보낸 그것이 어디쯤 지나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오전에만 4샷을 비웠다.

또 마시면 이제 정말 아플 텐데.

모르지 않았다.






다시 또 지옥.

견딜 수 없어 책을 집어든다. 

눈으로 글자를 좇는다.

복도로 나 있는 창을 통해 옆 반 선생님이 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이쪽으로 온다.

제발 내게 말 걸지 마.

닫혀 있는 문을 열지 마.


문 앞까지 온 그녀가 그냥 간다.

다행이다. 

다시 글자에 초점을 맞춘다.

커피를 마신다.

밤에 잠들지 못할 텐데.

이제 아플 텐데.

 

또 한 모금 들이킨다.

도저히. 

두 모금 밖에 마시지 않은 그것을 들고 화장실로 뛰어간다.

텀블러의 뚜껑을 열고 세면대에 붓는다.

새하얀 세면대를 검게 물들이며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짙은 갈색의 그것을 바라본다.

 

사약 같네.

무심코 생각한다.

이 사약 같은 걸 들이켜고 있었구나.

하루에 세 잔씩이나. 

그럼 나는 하루에 세 번씩 지옥엘 다녀오는 건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이젠 별 생각을 다 하네.

무심코 이어지던 생각의 고리를 끊어낸다.

 

지옥 같은 새벽을 지새우게 될 줄 알면서도.

위가 쓰려올 것을 알면서도.

오늘도 마실 수밖에 없다.

사약 같은 그것을. 하루에 세 잔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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