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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Jun 24. 2024

현수는 필요하다는 감각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었다.

 현수는 부족함이라고는 느껴본 적 없었다. 젊은 현수의 아버지가 조그맣게 철강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현수의 집은 승승장구했다. 현수의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고, 현수의 어머니는 그런 당신의 남편을 전적으로 믿고 가정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     

 

 현수는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현수는 무언가 필요하다는 감각에 익숙지 않았다. 필요함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손에 쥐어져 있었으므로. 현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여자들은 현수의 다정함을 독점하고 싶어 했고, 남자들은 친구 사이임에도 그를 동경했다.


 현수는 무엇이든 쉽게 건넸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아무리 특별한 것이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그것들을 갈망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현수에게는 모든 것이 부수적이었고, 무언가를 '잃는' 행위는 어떤 의미도, 영향도 없었다.


 그런 현수를 바꾸어 놓은 것은 희영이었다. 희영은 현수가 처음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이었고,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희영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왜 또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덮어놓고 사과하면 세 달 정도는 잠잠할 희영이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다크초콜릿 사줄까?” 

현수는 애교를 섞어 말했다. 그리고는 희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렇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백지장 같이 뽀얀 얼굴에 체리 같은 입술을 가로로 그리며 환하게 웃을 희영이었다.      


 그러나 몇 초 간의 정적. 그날따라 희영은 희영 특유의 사람을 녹아내리게 하는 미소를 쉬이 보여주지 않았다. 현수는 머리를 굴렸다. 뭘 잘못했지. 웃지 않는 희영을 보면 겁이 나는 현수였다. 낯선 길 한가운데서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희영의 눈치를 살폈다.      


“나 임신했어.”

희영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앞만 보며 말했다.

“... 뭐.. 뭐라고?”

현수는 분명히 잘 들었지만 잘 듣지 못했다고 확신하며 한 번 더 물었다.     

“임신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희영아.”

“멍청아.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들어?”

희영은 전에 없던 커터칼 같은 소리를 내며 말했다. 


 현수는 그런 희영이 낯설었다. 희영이 하는 말도 낯설었다. 우리가 매일 아지트처럼 앉아 있던, 오늘도 여지없이 우리만의 공간인, 음악관 앞 등나무도 낯설었고, 6년째 다니고 있는 탓에 벌써 여섯 번째 맡고 있는 캠퍼스를 가득 채우는 라일락 향기도 낯설었다.

     

“지울 거야. 애들한텐 절대 말하지 마.”

“희영아, 잠깐만.” 

“너도 이제 안 봐.”

“희영아. 그게 무슨.”

희영은 현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희영아 나 좀 봐봐.”

희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현수가 곧잘 메던, 눈을 반짝이며 “이거 예쁘다.”라고 말하는 희영에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건네었던, 하늘색 이스트팩을 등에 걸치며 일어났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넌.”

희영은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다음 말이 무엇일까. 현수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숨이 가빠옴을 느꼈다. 두려웠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절대. 그것만 해.”

그렇게 말하고 희영은 서문을 향해 걸어갔다.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늘 그랬듯.     

 현수는 조금씩 작아져가는 희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절대 뒤돌아 보지 않을 것이다. 현수는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도 한참을, 다리가 저린 줄도 모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오지 않을 배를 기다리는 미망인처럼. 등나무 아래에서. 그렇게 한참을.








 현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건 희영을 배신하는 일이니까. 그건 희영을 무시하는 일이니까. 희영과 희영이 잠시나마 품었던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을 째깍째깍 흘려보내는 시계추처럼 현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현수는 몇 년째 잠을 이루게 해주는 약을 먹고 있었다. 뜬 눈으로 사흘을 보내던 어느 밤, 룸메이트 우영이     보다 못해 자신이 먹던 흰색의 작은 알약을 건네었고, 그것을 계기로 몇 년째 약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어쩌다 약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현수는 어김없이 희영을 떠올렸고, 희영과 함께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우리의 아기를 떠올렸다. 밤이 새벽이 되고, 새벽이 아침이 되는 그 많은 날 동안. 달이 차오르고 다시 작아지는 무수히 많은 밤 동안.

      

 현수는 이따금 희영의 메신저 프로필을 살폈다. 혹시 모른다. 처음 보는 남자 사진이 올라와 있을지도. 그리운 희영의 아버지 모습이 올라와 있을지도. 그리고. 태어났다면 다섯 살쯤 되었을 우리의 아기 사진이 올라와 있을지도.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 저...”

“네, 말씀하세요. 어디시죠?”

“잘 지내셨죠. 저 희영이 언니 한주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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