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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Jul 16. 2024

와인과 욱

와인을 좋아하세요...

 우리는 6번째 와인을 시음했고 7번째 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7번째는 Oboe라는 이름의 레드와인이었다.


 포르투갈에서 온 와인 어드바이저 디오고가 말했다.

"와인은 무척 섬세해요. 코르크 마개를 따고 몇 시간이 흘렀는지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거든요. 지금 따라드리는 Oboe는 최상의 맛을 위해 강연 2시간 전에 미리 오픈해 놨던 겁니다."  

 

 와인을 채워주러 돌아다니는 매니저가 우리 테이블로 왔다. 블랙베리처럼 검붉은 색이 네모난 와인잔을 채웠다. 배운 대로 향기를 먼저 맡았다. 음 포도 냄새. 와인은 공기와 섞여야 제 맛이 난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해야지. 들숨과 함께 Swiring 한 바람소리를 내며 와인을 입 속으로, 양 볼로 흘려 넣었다. 가글 하듯 입 안을 헹구고 꿀꺽 삼켰다. 쌉쌀한 단맛과 함께 입 안이 건조해져 옴을 느꼈다.








 강연이 끝난 후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디오고의 말에 욱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까부터 디오고에게 첫사랑 이야기를 물어보자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였다. 설마 진짜 그걸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반쯤은 불안한 마음으로 오른편에 앉은 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마신 와인들 중 디오고가 가장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욱이 물었다.


 디오고는 많이 받아본 질문이라는 듯 특별한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때그때 달라요. 같은 와인이라 해도 언제 오픈했는지, 얼마나 보관했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마시는지에 따라서도요. 그래서 특정 와인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디오고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와 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되물었다.

"그럼 오늘! 지금!"

그러자 디오고가 웃음을 섞어 말했다.

"Ha ha, Tricky~"

그리고는 뜸을 들여 답했다.

"오늘 낮엔 더웠으니까 스파클링이 섞여 있는 화이트 와인을 골랐을 것 같아요. 저녁엔 바디감과 밸런스가 훌륭한 레드 와인을 고르는 게 좋겠네요."


욱이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와, 역시 섬세하네."


 이번에는 앞에 앉은 여성 분이 손을 들었다.

"저는 와인에서 바닐라 향이 난다든지, 초콜릿 향이 난다든지 하는 걸 잘 못 느끼겠더라고요. 향을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요."


디오고는 답했다.

"와인 향을 잘 느끼고 싶다면 혼자 또는 둘이서만 와인을 마시는 것을 추천해요. 와인은 여러 사람이 함께 마시는 즐거움보단 차분하게, 천천히, 분석하듯 마셔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죠."


그리고 덧붙였다.

"보관하는 기간에 따라서도 향이 달라져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몇몇 강한 향이 다른 향들을 누를 수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향은 옅어지고, 다른 향들과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향을 맡고 싶으면 오래 보관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욱은 스스로를 사회성이 아예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을 질색하고, 웬만한 사람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는 묻지 않는 이상 먼저 말하는 법이 없고, 선을 넘는 사적인 질문은 뭉개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것에 능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거리감은 각자 다르겠지만 적어도 욱은 남들의 곱절은 되는 거리감을 원하는 것 같다.


 사람들 속에서 욱은 말 수가 적고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나 대화가 이리저리 헤매고 있으면 먼저 나서서 "비판은 자제하고 말해볼까요."라고 말한다. 또는 "그 부분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넘어갑시다."라고 말하며 대화가 불편했을 누군가를 배려한다. 사람들은 욱을 똑똑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둘이 있을 때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욱은 자신이 그리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그 미래엔 꼭 내가 함께다. 오늘 겪은 시시콜콜한 일상과 거기서 들었던 느낌들을 먼저 그리고 꽤 많이 얘기한다. 나였으면 숨기고 싶었을 과거 이야기나, 내밀한 가족사도 답하길 주저하면서도 '이렇게까지 솔직하다고?' 할 정도로 거짓 없이 다 말한다. 14일 중 12일을 만났다며 이 정도는 만나야 만난 것 같다고 표현한다.


 사람이 줄을 선 카페 앞에서도 세상에 우리 둘만 존재한다는 듯 이상하고 느끼한 어깨춤을 춘다. 김동률 모창을 보여주겠다며 굵은 목소리로 "다쉬 사랑한다말할까아앗~"을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할 때까지 한다. 틈만 나면 웃긴 말을 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각종 언어유희와 아재개그를 가감 없이 내뱉는다.


 욱은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알고 마침 필요했던 것을 적재적소에 건넨다. 음식을 다 먹으면 티 나지 않게 휴지를 뽑아 내 앞에 놓고, 어딜 가든 편하고 푹신한 의자를 골라 옮겨놓는다. 내가 유독 날카롭게 반응하는 단어를 귀신같이 캐치해서는 절대 발설하면 안 될 그 이름 '볼드모트'처럼 조심해서 말한다. 오늘은 무조건 자기가 좋아하는 거 먹을 거니까 어진이는 묻지 말고 조용히 따라오라고 해놓고선, 막국수집을 향해 뛰어간다.(막국수는 나의 최애 음식이다.)


 오랜 시간 욱을 지켜본 그의 상사는 그를 사려 깊고 섬세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일 터에서의 그가 어떤 모습일지 조금도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은 욱을 알게된 지 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울며불며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욱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변하는 그를 보며,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디오고의 와인 강연을 듣고 나오는 길이었다. 우리는 약속했던 대로 편의점에 들러 와인을 샀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상아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왈츠 같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와인이었다. 우리는 그걸 들고 애정하는 장소로 갔다. 욱이 서둘러 물 잔을 씻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오프너로 와인 코르크를 땄다. 그리고 내쪽에 있는 물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블랙베리처럼 검붉은 색이 동그란 물 잔을 채웠다.


 나는 배운 대로 오크통의 버터리한 향을 맡았고, 비에 젖은 흙냄새가 배어있는 포도의 맛을 음미했다. 꿀꺽. 와인의 쌉쌀함을 목으로 흘려보내며 직감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섬세하고 둘이 있을 때 진가가 나오는 것을 오랫동안 보관하게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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