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고향 (글제: 텃밭)
이런 데 살면서 농사나 지을까?
논밭이 많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내 아버지의 꿈은 농사꾼이었다. 조선소에 취직하여 30년을 근속했지만 농사꾼의 꿈을 놓으신 적은 하루도 없었다. 한동안 주말 농장을 전전하시던 아버지는 명예퇴직 후 퇴직금을 탈탈 털어 밭을 사셨다. 중학교 교실 3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큰 땅이었다. 아버지는 거기에 컨테이너 박스를 들여놓고 밤낮없이, 살갗이 새카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말 못 하는 생명을 보듬으셨다.
“이건 고추고, 얘는 토마토야. 싱싱하지? 유진이가 좋아하는 고구마도 많이 심었어.”
마치 도슨트라도 된 양 아버지는 평소에는 잘 잡지도 않던 내 소매를 잡아끄셨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유독 말이 많고 빨라지셨다.
농산물이 잔뜩 나는 여름날에는 식사 때마다 “가지 먹어봐, 유기농이야. 상추 큰 것 좀 봐, 이게 계속 자란다?”라고 마치 자식 자랑을 하듯 말하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그런 아버지께서 당신 스스로 텃밭을 정리하셨다. 엄마가 하루아침에 우리 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막거리를 거나하게 드신 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엄마가 주말엔 쉬고 싶은데, 아빠가 자꾸 밭에 끌고 가서 그렇게 됐을까? 농사가 힘들어서 병이 왔을까? “
나는 펄쩍 뛰며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도 밭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알겠어. 유진이 말 들을게.“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마음이 욱신 찌릿해져 옴을 느꼈야만 했다. 원인을 추측할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받아들일 수도 없는 엄마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오래도록 아버지를 죄책감으로 멍들게 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내가 퇴근할 때까지 완벽하게 혼자다. 혼자서 밥을 차려드시고, 혼자서 산책을 하고 혼자서 영화를 보신다. 아버지의 살갗은 하얗게 돌아온 지 오래이고 농산물은 전부 시장에서 구입하신다.
“사 먹는 게 훨씬 싸다”, “농사는 사서 하는 고생이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시지만, 나는 그 말이 왜 당신 스스로를 설득하는 말처럼 들릴까. 단언하듯 말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마음이 울적해져 옴을 느껴야만 했다.
모처럼 맑은 날, 아버지를 모시고 양평엘 갔다. 전원주택 단지들과 옆에 붙은 텃밭을 둘러보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런 데 살면서 농사나 지을까?”
얼마 만에 보는 아버지의 초롱초롱한 눈빛인가.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지! 아빠 농사 좋아하잖아!”
“에이, 아니다. 너무 힘들 것 같아. 우리 유진이랑도 같이 못 살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도와줄게!”
아버지는 대답 없이 알쏭달쏭한 미소만 보이셨다.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다시 농사를 지으셨으면 좋겠다고. 작지만 큰 삶의 의미를 찾으셨으면 좋겠다고.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다짐했다. 그날이 오면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자주 가서 도와드려야지. 엄마가 그러셨던 것처럼. 꼭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