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의 출처는 시간
중요한 날일 수록 힘을 빼는 습관이 있다.
대학 동창 은영의 결혼식에 갈 땐 평소 출근할 때 입던 복장에 스카프로 포인트만 줬다.
학부모 공개수업처럼 그다지 잘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밉보이고 싶지도 않은 다수의 시선을 받는 날엔 100번은 입었을 낡은 남색 슬랙스를 입는다.
인생에 몇 번 없던 소개팅 날에는 항상 똑같은 옷을 입었다. 언제 번질지 몰라 불안한 마스카라를 포함한 색조화장은 일절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내게 무슨 말을 건넬까, 그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긴장되는 시간들.
우리 반 최고 말썽쟁이 훈이가 수업시간에 이상한 말 하면 안 되는데, 현지가 평소처럼 발표를 너무 길게 해서 시간을 많이 빼앗으면 안 될 텐데. 내 손 밖에 있는 40분.
처음 보는 낯선 상대와 마주 앉아 두 시간은 꼬박 대화를 나눠야 하는 조마조마한 저녁.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많은 날일 수록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 통제하려고 드는 습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보통의 20대 여자는 아마 나와 같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날일 수록 평소답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예쁘고 좋은 것을 입고 곱게 화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우리나에서 나고 자란 보통의 20대 여자이면서도, 굳이 날 것의 모습으로 대응하는 걸까?
'여유를 보이기 위해서'다. 중요한 자리,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신경 좀 썼어.'라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다. 새로 산 옷을 처음으로 입고 나온 사람처럼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색한 사람도 없으니까. 그만큼 섹시하지 않은 것도 없으니까.
섹시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남녀 간에 느끼는 섹슈얼한 단어 말고, 그냥 인간대 인간으로서 섹시한 사람. 섹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섹시의 출처를 알기 전에 그와 반대되는 낱말을 먼저 떠올려보고자 한다. 국어사전에 있나? 찾아본 적은 없지만 그런 낱말이 존재한다면 그건 ‘어색’이 아닐까? '어색'함 만큼 섹시와 어울리지 않는 낱말이 또 있을까?
무엇이든 처음 하는 건 다 어색하다. 처음부터 능숙할 수 있다면 그건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일 터. 그렇다면 섹시의 출처는 시간이 아닐까?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능숙해질 시간이 있다면 누구나 섹시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능수능란해지는 데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6개월? 1년? 너무 짧은 것 같다. 그럼 3년? 그 정도면 섹시해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대개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나이 먹는 것에도 몇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고수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주변 사람들이 다 거기서 거기이다. 아직 섹시해질 만큼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각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구분이 쉬워진다.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만 가고 고수와 비고수는 각자 다른 시간들을 보냄으로써 서로를 구분 짓는다.
일례로 헬스고수를 떠올려본다. 나는 왜 몸이 좋은 사람을 멋있다고 느낄까? 단지 근육이 크다고 해서 멋있는 걸까? 아니다. 그것보다는 그가 참았던 고통, 흘렸던 땀방울, 투자한 시간들이 몸만 봐도 고스란히 느껴져서이다.
존경하는 글쓰기 고수, 헬스 고수, 바이올린 고수, 패션 고수를 떠올려본다. 섹시하다. 그들의 시간을 상상해 본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쏟았을까? 얼마나 인내했을까? 어떻게 저렇게 섹시하게 글을 쓰고, 몸이 좋고, 바이올린을 잘 켜고, 옷을 잘 입고... 여기까지만 하자.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에게 흔적을 남겨놓는다. 마치 자주 짓는 표정으로 지어지는 얼굴 주름처럼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어떤 형식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섹시한 사람이 되고 싶다.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많은 것을 통제 하에 두고 싶으며, 고수가 되고 싶다. 억지로 책을 펼친다. 운동을 가고, 글을 쓴다. '힘들다.', '하기 싫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오르지만 어쩔 수 없다. 시간은 내 감정이나 컨디션과는 관계 없이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을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