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웩. 어우 완전 써. 이걸 대체 왜 먹어요?
출근했다. 늘 그렇듯 텀블러와 커피캡슐을 챙겨 교무실로 향한다. 교무실엔 우리 학교에 딱 하나뿐인 얼음 정수기가 있다. 거기서 얼음을 받는다. 이른 아침의 교무실은 운이 좋지 않으면 불편한 교감선생님을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눠야 하고, 그보다 조금 더 운이 좋으면 편한 교무부장쌤을 만나 적성에 맞지 않은 스몰토크를 나눠야 하는 장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의 변수가 작용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꼭 얼음을 받으러 교무실에 간다.
차가운 물방울이 생긴 텀블러를 들고 이번에는 정다움실로 간다. 캡슐을 넣고 동그란 버튼을 누른다.
지잉-
짙은 갈색의 에스프레소가 추출된다. 어느새 쌉싸름한 향기가 정다움실을 가득 채운다. 텀블러 안을 한 번 훔쳐본다. 연노랑색의 크레마가 짙은 갈색의 커피를 숨겨주듯 얼음 속에서 반짝인다. 이제 됐다. 출격 준비 완료. 점심시간 전까지 4시간은 버틸 수 있다. 아이들이 좀 성가시게 굴어도 웃어줄 수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첫인상은 신혁쌤이다. 신혁쌤은 나의 영어 학원 선생님이셨는데, 탁월한 교수능력과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꼴초였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커피 중독이었다. (덕분에 심각한 입냄새가 났던 것은 안비밀이다.)
신혁쌤은 항상 나무커피에서 커피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학원 1층에 프랜차이즈 카페도 있었지만 꼭 멀리 있는 그 카페에 가라고 했다. 신혁쌤과 나는 틱틱 투닥, 서로 흘겨보며 대화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으므로 나는 심부름을 할 때마다 '쓸데없이 입은 또 고급'이라고 툴툴대며 그 먼 나무카페를 갔다.
그날은 다른 날과 비슷하게 나무카페로 심부름을 가는 날이었다. 한여름 뙤약볕에 두피에서부터 땀이 흘러내리는 게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걸 보니 아마 여름방학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날이 바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맛본 날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쌤. 커피 사 왔어요. 이게 그렇게 좋으세요?"
"담배 한 대 피우고 이거 한 잔 쫙 마시면 세상 스트레스가 다 풀려. 너도 한 입 먹어볼래?"
"네, 한 입만요."
나는 신혁쌤의 손에서 커피를 뺏어 들었다. 빨대를 통해 들어온 갈색물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떫고, 걸레 빤 물처럼 쓰디쓴 맛이었다.
"우웩. 어우 완전 써. 이걸 대체 왜 먹어요?"
"크크크 쓰냐? 인마, 너도 언젠가 이게 맛있어지는 날이 올 거다. 그때 되면 학원 놀러 와. 내가 커피 백 잔 사줄게."
"으으. 그럴 일 절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커피 말고 초코스무디 백 잔 사주세요."
"그건 비싸서 안 돼. 너도 그 이상하게 달기만 한 거 말고 커피의 매력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거다 크크."
"절대 안 와요!"
나는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신혁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게 커피는 지독히도 편식이 심한 내게 '절대 입에 넣으면 안 되는 것'으로 기억되었다.
커피에 대한 기억이 180도 바뀐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20살, 오랜만에 학원가엘 갔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한여름이었다. 무심코 걷던 학원가 골목 한편에 나무커피가 있었다. 신혁쌤의 제자로 있던 3년 동안 밥 먹듯이 갔던 그 카페. 신혁쌤이 꼭 그 카페 아메리카노를 사 오라고 신신당부했던 그 카페. 더위를 식혀볼 요량으로, 아니 어쩌면 신혁쌤이 조금 생각나서 그 가게에 들어갔다. 그리고 홀린 듯 3년 동안 신혁쌤이 밥보다 더 많이 먹은 메뉴를 주문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긴 시커먼 물. 이게 대체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한 입. 입술에 힘을 주었다. 빨대를 타고 들어온 그 시커먼 물은 쌉쌀하고, 고소하고, 조금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옛날에는 분명 쓰기만 했었는데 뭐지?'
탄맛이 나는 것 같으면서도 개운하고 꽃향기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누룽지처럼 구수한 맛이 났다. 보리차 티백 10개를 소주잔에 담아 몇 시간을 우리면 이렇게 눅진하고도 고소한 맛이 나려나? 그때부터였다. 신혁쌤의 저주 같은 말이 실현된 것은. 이상하게 달기만 한 거 말고 커피의 매력을 느끼게 되는 날.
그날 이후로 카누표 가루 커피, 동남아표 7 커피, 별다방표 탄맛 커피, 편의점표 싸구려 커피 등등 커피라고 하면 사족을 가리지 않고 사랑했다. 원하는 만큼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하여 카페 알바를 해보기도 했고, 위가 쓰려서 한 동안 커피를 못 마신 적도 있다. 흑임자커피니, 비엔나커피니 하는 혼종들에 이따금 유혹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돌고 돌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고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날에는 하루 종일 커피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손에 들려있다면 어느 공간에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든 4시간은 가뿐히 버틸 수 있다.
오늘만 해도 세 잔의 커피를 마셨다. 출근해서 한 잔, 운동하고 한 잔,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마지막 한 잔. 쌉쌀한 향기. 개운한 뒷맛. 실패 없는 10개 티백의 보리차. 입에 힘을 주어 마지막 한 입을 빨아들이며 생각한다. 신혁쌤은 잘 계시려나. 언제 한 번 찾아뵈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