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어진 Sep 04. 2024

이룬에게

우리의 편지

이룬에게


안녕. 엄마야. 


솔직히 말할게. 엄마는 이룬이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어. 네가 딸일지 아들일지 그런 것들이 아니라, 너의 존재 자체를 말이야. 생명이라는 기적이 엄마에게도 올 수 있을까? 엄마같이 불행한 사람이 이룬이 같은 축복에 닿을 수 있을까? 


사실 엄마는 너무 불충분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야. 어찌저찌 성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책임'을 단언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아. 분명히 사과하는 법을 모르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법을 몰라. 사람 보는 눈은 아직도 한참 부족하고.. 그래서 가끔 상처를 받기도 해. 


네 존재가 이렇게 불분명했다는 것을 알면, 엄마가 네게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네가 실망할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보통 강한 확신과 사랑으로 탄생했다고 믿어버리곤 하니까. 


이렇게 그릇이 부족한 엄마를 용서해줄 수 있을까? 


게다가 말이야... 한 명의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어. 온 마을에는 사람이 엄청 많지? 그만큼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런데 사실, 엄마에게는 마을이 없어. 엄마 곁에는 마을은 커녕, 너를 함께 키워내기엔 조금 부족할지도 모를 외할아버지와 이모밖에 없거든. 


언젠가 이룬이가 외할머니에 대해 물어볼 날이 오겠지? 왜 외할머니가 없는지, 외할머니는 어디 갔는지 물어보는 날이 올 거야. 그러면 엄마는 자세히, 아주 자세히 말해주고 싶어. 외할머니는 왜 없고, 어디로 가셨는지. 그리고 외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날이 오면 엄마는 슬플까? 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기쁠 것 같아. 왜냐하면 외할머니는 엄마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멋있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거든.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그때가 오면 엄마를 한 번만 안아줄래? 손잡고 외할머니가 계신 평택에 같이 가줄래? 


엄마는 두려워. 어린 네가 건강하지 않을까 봐, 혹시 이상한 친구들과 어울릴까 봐,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그리고 엄마가 너를 믿지 못하고 구속할까 봐. 


엄마는 너를 자유로운 아이로 키우고 싶어.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그랬주셨던 것처럼 말이야.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느라 학원을 빠져도, 밤새 드라마를 보다가 중간고사를 망쳐도, 가끔 엄마에게 나쁜 말을 해도 "우리 딸, 그랬어?" 하고 웃어주고 싶어. "좀 그럴 수도 있지"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엄마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네게 잔소리를 할 것 같거든. 이런 엄마여도 받아줄 수 있어? 네가 너무 엇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해줄 수 있어?


선배 선생님들이 가끔 엄마한테 와서 하는 말이 있어. 자식을 키워보지 않으면, 학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없대. 그리고 자식을 키워보면 학생들을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대. 심지어는 화도 잘 안 난다는 선배 선생님도 있어. 집에 있는 내 자식 생각 나서 화가 안 난다나 뭐라나. 정말 그럴까? 


몇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 엄마가 엄청 잘 따랐던 아줌마 선생님이 계셨거든? 그분이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어.

"어진쌤, 내가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뭔줄 알아? 우리 딸, 지수를 낳은 일이야." 

엄마는 놀라서 되물었어.

"네? 정말요? 아니 쌤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그렇다구요? 진짜요?"

"내가 아무리 많은 일을 했어도.. 지수를 낳은 것보단 못해. 아이는 엄청난 존재거든."

엄마는 그때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어. 그 아줌마쌤은 진짜 멋진 커리어 우먼이셨으니까. 사실 지금도 완전히 이해가 되진 않아. 아마 이룬이 너를 만나기 전까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사실 엄마는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 그것들을 하나씩 해치우다 보면 하루가, 일주일이 너무 빨리 지나가. 읽고 싶은 책이 탑처럼 쌓여있고, 써야할 글과 하고 싶은 운동들이 "언제 써줄거야? 언제 해줄거야?" 하며 엄마 뒤에서 잰걸음으로 쫓아오고 있는 것만 같아. 그래서 엄마는 하루종일 뛰어야만 해. 그런 엄마가 너를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네가 엄마에게 온다면 그런 행운이 내게도 일어난다면

약속할게. 

절대 너를 구속하지 않겠다고.

엄마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너라고.

욕심을 챙기느라 너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너를 사랑할게. 

이건 엄마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야. 

2024.8.29.목요일 늦은 저녁.

엄마가. 






이룬에게.           


여름이다. 나는 유진과 이어올 겨울을 생각한 적 있다. 내년을 생각한 적 있다. 너의 이름을 생각한 적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유진은 신비롭게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유진과 둘이서 이어올 계절과 내년과 너의 이름과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너무 불충분하고 이기적이며 책임을 단언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고 사과하는 법을 모르고 용서하는 법도 모르고 그릇도 작다. 그럼에도 나는 유진과 함께 있으면 비로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유진도 비슷한 이유에서 나와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너에게 쓴 유진의 편지를 읽었다. 유진은 걱정한다. 외할머니의 부재를. 혹시 있을지 모를 실수를. 욕심을. 그런 생각들에 둘러싸여 강한 확신과 사랑보다 회의와 고민과 부담이 커져가고 너의 존재마저 희미해지는 유진의 마음을 읽었다.      


이상한 일이다. 유진은 늘 웃는 얼굴을 한다. 자신감이 넘치고 밝으며 긍정적이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늘 상처와 회의와 결핍을 품는다. 외할머니의 빈자리를 오래도록 슬퍼한다.      


그래서 유진은 매일 커가는 사람이다. 흔들리고, 다시 부여잡고, 불안해하고, 다시 가다듬고, 성찰하고, 다시 자신감을 찾고. 매일을 알차고 부지런히 한발 한발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넘어진 사람이다. 그래서 늘 일어나는 중인 사람이다. 내가 존경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 이토록 흔들리며 커가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그런게 아닌가 싶다. 불완전한 사람끼리 의지해가며, 붙들어가며, 붙잡아가며, 무릎 꿇어가며, 고개 떨구고, 다시 북돋고, 일으켜가며, 먼지를 털어내주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임을. 그 와중에 커다란 사랑을 받고, 현명한 사람의 도움을 받고, 지혜로운 사람의 조언을 듣고 또 하루만큼 성장해가는 일임을.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너 또한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매일 커갈 것이다. 너의 엄마가 그런 것처럼. 때로 부족하고, 때로 모자라고, 때로 넘어지고, 때로 울더라도 다시 채워주고 챙겨주고 일으켜주고 웃게 해주는 사람이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걸 잊지 말기를 바란다.      


여름이다. 나는 유진과 지난 봄을 떠올린 적 있다. 지난 겨울을 떠올린 적 있다. 지난 이야기를 떠올린 적 있다. 그러는 동안 벚꽃을 보았고 눈을 보았고 많은 글을 썼고 많은 음악을 들었다. 그중 가장 예쁜 꽃잎과 깨끗한 눈송이와 절정의 음악과 진솔한 글들이 모여 너를 이루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진은 신비롭게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유진과 둘이서 이어올 계절과 내년과 너의 이름을 이루었다. 너는 이미 모두 이루었다. 흔들리는 두 삶이 너로 인해 이루어졌다.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너는 이미 완전하다. 나머지는, 너의 몫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악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