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숙집에 산다. 여름에 마당에 놓인 평상에 모여 앉아 수박을 썰어 먹으며 TV를 보는 장면을 떠올렸다면,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다. 짱구 집처럼 큰 3층 단독주택에, 1층엔 주인집이, 2층엔 여학생이, 3층엔 남학생이 살고 옥상엔 빨래를 널 곳이 있다. 각자 단독 방에서 조용히 살고, 공용 화장실은 층마다 두 개씩 있다. 2층에 있는 부엌에는 아침 8시와 저녁 6시에 맞추어 연중무휴로 끼니가 제공되고, 각자 식판에 음식을 담아 방에 가서 먹는다.
이곳은 학교 기숙사 거주 연장에 떨어져서 들어왔다. 밥이 나오는데 보증금 없이 40만 원, 1인실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 정도면 거저였다. 나는 그곳에서 1년을 버텼다. 1평 남짓에 나의 모든 짐과 침대, 책상과 함께 지내야 했고, 작은 창문은 그보다는 환기 구멍이라 불리는 게 적합했다. 북향으로 난 그곳으로 종종 담배 냄새가 들어왔다. 여름에도 늘 어두웠지만 다행히 형광등은 밝았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외출하고 약속이 없으면 혼자 카페에 가서 앉아 있었다. 없는 짐에서 무엇을 버릴까, 어떻게 테트리스를 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그날도 짐을 정리하다가 옆 방으로 이사 가기로 했다.
55만 원짜리 옆 방은 그야말로 대궐 같았다. 3평에, 벽의 3분의 2는 되는 커다란 남향 창문이 달려있었다. 햇빛 드는 방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다인실 학교 기숙사에서 하숙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나는 놀라운 걸 알게 되었는데, 스스로 번 돈은 자율적으로 써도 된다는 것이었다. 가난했던 나는 무조건 아껴야만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사는 건 이유를 막론하여 사치로 분류하고 죄책감을 느꼈다. 돈을 잘 모으고 있었고, 한 번도 금전 관련 문제가 생긴 적이 없음에도 나는 항상 소비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스물아홉이 되도록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당당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돈은 알고 보니 의사 결정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는 20대의 끝자락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이제 남향 방에서도 한 해가 가니 새로웠던 쾌적함은 사라지고 또 못 견딜 지점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내가 고르지 않은 오래된 책걸상과 침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깔린 카페트, 공용 화장실, 방음 문제 등이었다. 이제는 여윳돈이 별로 없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유지비가 다달이 70만 원이 넘고, 모아둔 돈은 학교에 다니며 다 까먹었다.
그럼 본가에 들어가면 좀 나을텐데. 가서 관리비 정도 내면서 통근하면 대충 계산해도 다달이 50만 원은 최소한 아껴질 테고, 밥을 차려 먹는 문제도 걱정 없을 테고… 하지만 세상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처음 들어온 1평 방에 창문이 아니라 환기 구멍이 달려있었더라도, 나는 그곳에서 더 숨이 트였다. 이젠 뭐든 훤히 꺼내놓게 되었다. 원한다면 아무 자극도 없이 조용히 누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본가에 살 때 엄마를 사랑했기에 두 가지를 요구했다. 방문을 잠그게 해 달라. 잠겨 있으면 열 때까지 두드리지 말고 그러려니 둬 달라. 그리고, 친구와 전화 통화 좀 하게 해 달라. 엄마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또 나를 궁금해하여 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쓰다 만 일기장을 급히 덮고 문을 열어야만 했다.
‘여기서 사는 것 자체가 사치야.’, 다달이 월세를 입금하고, 처음 보는 지출 액수가 찍힐 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생각을 고쳤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만 이런 거고 월급 액수가 커지면 다 해결될 일이라고. 처음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의 나에게 걱정을 의탁했다. 굶어 죽진 않겠지.
하숙집의 보안은 신기하게 철저하고도 허술하다. 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면 각자의 방은 열쇠로 열게 되어 있다. 나는 열쇠를 두 번 넘게 잃어버려 고생한 후로 외출할 때 내 방문을 잠그지 않는다. 홈 CCTV가 있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방에 들어와 생활할 때 비로소 내 방을 잠근다. 누구도 이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