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그림을 찾아가는 것
그림에 대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나 자신의 기대치가 낮다는 것이다. 난 어떤 그림을 그려도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다. 못 그리면 웃겨서, 평소보다 나아 보이면 뿌듯해서 좋다. 그림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우리 집에서 미술 소질이 있는 건 오빠뿐이었기에, 내가 뭘 그려도 돌아오는 말은 운명론처럼 ‘미술은 재능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 중요한 재능이 내겐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을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다.
가을, 지나치게 밝은 햇빛 아래의 내가 흐려지는 느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글을 오래 쓰지 않았다. 쓰는 이유를, 나의 재능을, 아무도 답해 주지 못할 질문들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소에 가서 싸구려 종합장을 하나 샀다. 집에 와서는 오랜만에 4B 연필을 커터칼로 깎고 첫 장을 펼쳤다. ‘내가 무슨 그림이야?’, 민망한 헛웃음이 번졌다. 길 가다 찍은 오리 사진을 처음으로 그렸다. 자세히 본 만큼 천천히 그려 보니 나뭇잎도, 스폰지밥도 꽤나 선명한 윤곽선을 가졌다. 내 머릿속의 무언가를 연필 끝에서 보는 건 처음 자전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지고 마음속이 간질간질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다.
오랜만에 그림을 실컷 그렸다.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 L을 만나 함께 오랫동안 그렸다. L의 조언으로 내가 가진 안 좋은 버릇을 알게 되고, 어떤 재료를 쓸지 고민했다. 그녀는 나에게 소질이 있다고 늘 주장해 온 친구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평소 빈말은 안 하는 친구여서 반이라도 믿어졌던 것이다.
이전에 그릴 것을 찾지 못하고, 눈에 차지 못하는 그림만 그려질 땐 스케치북을 덮고 몇 달간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아니 사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그러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프린터가 아니었으므로 늘 투박한 결과물 뿐이었다. 오늘 나는 L의 피드백을 바로 흡수했다. 내가 잘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못 하면 장난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밝은 오후에 만나서, 가로등 불빛이 하늘에 떠 있을 즈음 집에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