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예찬
아이패드를 두고 굳이 노트를 쓴다. 노트는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허술하게 비밀을 흘려버린다. 외출이라도 하려고 하면 작은 가방은 고이 잠들게 된다. 종이 뭉치는 꽤 묵직하다. 글자 색을 바꾸려면 형형색색의 장비가 더 필요하다. 사진을 붙이려면 우선 프린터부터 켜야 한다.
그러나 내가 가진 생각들이 볼펜 잉크가 되어 지면에 맺히고 굳어질 때 나는 주변에 맺혀있던 미지의 느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여받는 걸 느낀다. 마음이 답답할 때 거친 필체로 지면을 벅벅 긁으면 괜히 조금 나아진다.
잠들기 전 스탠드만 켜 둔 아늑한 방 안에서 지난 일기장을 뽑아 든다. 출간되지 않은 책을 읽으며 오래도록 지난날들을 가늠해 본다. 종이는 내 눈을 찌르지 못하고 그저 오는 빛을 묵묵히 받아내어 은은히 보일 뿐이다.
물성을 갖는다는 건 양날의 검이다. 눈앞에 있기에 더 선명하고, 부피가 있기에 자리를 차지한다. 한 장을 쓰면 팔에 잔잔히 전해오는 통증을 이겨내야 한다. 하나하나가 잉크 방울, 흑연 가루로 이루어져 있기에 지금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는 글자들은 필체마저 개성 있는 말투가 있다.
전기 없이, 다른 동력 없이 그저 존재할 수 있는 것, 뜨거운 햇살 아래 시원한 바람 부는 공원 벤치에 앉아 펼쳐보고 싶은 것은 항상 휴대하며 적는 나만의 기록장이다. 텅 빈 종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색연필을 마구 칠하는 세 살 아이처럼, 다 자란 말들을 빼곡히 적는다. 바람은 계속해서 불고, 페이지는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