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 덕후는 힘들어
스티커 한 판을 사서 한 번에 전부 써버리고 싶다. 다이소 천 원짜리 말고 비싼 수입 스티커를 사 버리고 마구 쓰는 거다. 가격을 안 보고 마스킹 테이프도 맘에 드는 대로 전부 사제낀다. 제일 비싼 양장본의, 금테를 두른, 무지 노트를 갑자기 사서 거기에 온갖 걸 다 붙이는 거다. 하루 종일 기록만 하고 싶다. 경제 활동과 전혀 관련 없이 재미만 있는 일들을 하루 종일 진득하게 한다. 24시간 365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니 살짝 지겹다. 그럼 일주일에 하루만 일하러 나가고 주 6일제로 놀아야지.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는 문구 투어를 다니고, 수요일에는 집에 박혀서 산 것들 쓰며 종일 기록하면 재밌겠다. 목요일에 일하고 금토일엔, 글방이나 그림 모임 혹은 약속을 다녀와서 쉴 거다.
근데 마스킹 테이프는 부피가 크다. 너무 많이 사면 그걸 수납하느라 시간이 다 가버린다. 그럼 스티커 붙일 시간이 없어진다. 마테는 마음에 드는 거 다섯 개 정도면 꽤나 괜찮을 것 같다. 가지고 있는 노트를 아끼지 말고 마구 써버린다. 펜 잉크가 닳고 색연필이 짧아진다. 다 쓴 스티커 뒷판이 투명하게 쌓인다. 한참 써도 겨우 하나를 소진할 거고, 리필이 팔짱 끼고 기다릴 거다. 그럼 또 시작이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자.
마음에 드는 게 열 장에 한 장 꼴은 그래도 나올 것 같다. 나 혼자만 보면 재미가 없으니 어딘가에 올려야겠어. 이왕이면 계정이 커졌으면 좋겠다.
꿈을 꿨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느낌이 좋았다. 밝은 빛이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 문구점에 출근해서 보니 새 제품이 들어왔다. 늘 눈독 들이던 멀티 색연필이다.
결국 샀다. 뜯어보니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다. 여덟 가지 색을 전부 칠해봤다. 퇴근하고 알록달록하게 밑줄 그으러 카페에 가야겠다. 이왕이면 오랜만에 그림도 그려야겠다. 이번 주는 6일 내내 일해야 하니까 이 정도 사치는 괜찮겠지? 집에 오니 이미 가지고 있던 색연필 세트가 보인다. 저것도 써야 할 텐데, 고민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