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문득 결정한 여행, 그리고 기다리는 마음
지나치게 솔직할까 봐 두렵지만 어차피 아무도 나를 모른다. 그것이 익명이 주는 자유이다. 읽으면서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연상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글 속에만 존재하고 현실 세계에서 당신을 알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 그러니 철저히 약속하기로 한다.
사실 여행을 가면 안 됐다. 심적, 경제적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떠난 것이다. 평소 내 성격 같으면 끊임없이 미래를 계획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해야 하니, 여행은 무슨 여행, 절대 안 된다고 철없는 나를 다그치며 도서관에 가야 한다고 재촉하기 일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떠났다. 내 고질병 같은 생각을 다 걷어차고, 무조건 떠나야만 했다.
아마 이별해서였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와 싸웠거나. 아니면 28살의 학부생으로서 새 전공이 너무 어려워 시험 스트레스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나를 그만 미워하고 싶어서. 아님 전부 다였나.
기말고사 즈음 이별하고 시험이 다 끝났을 때, 그제야 감춰뒀던 감정들이 밀려와서 매일 허전함과 슬픔, 동시에 해방감, 무엇인지 모를 감정과 생각들에 아주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글도 안 썼다. 너무 많은 감정과 생각이 누덕누덕 엉겨 붙어 구분하기가 힘들었고, 입체적인 마음을 평면에 글자로 옮겨 적는 게 왜곡이 심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만 읽었다. 건조하게 세상을 보기 위해 애썼다. 쉽진 않았다. 자꾸 흐르던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전면을 적셨다.
내가 너무 미웠다. 매일 날 선 말들이 나를 따라다녔다. 남에게서는 칭찬할 거리를 그래도 잘 찾는 것 같은데 유독 나에게만은 뭘 해도 잔소리를 했다.
이것 봐, 집에 밥이 있는데도 외식을 했잖아. 도서관 놔두고 카페를 왜 가니? 사치스럽게. 아직도 학생이면 언제 돈을 벌래?
시시각각 은행 앱을 켜서는,
오늘도 얼마를 썼네, 이제 학비도 바닥나 가는데 잠깐 휴학하고 모은 돈을 다 까먹는구나. 이 나이 먹고 대체할 줄 아는 게 뭐니.
사실 그런 말을 듣기엔 너무나 책임감이 강했고, 지나치게 쓰거나 지나치게 아끼지 않는 소비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정한 길을 가기 위해 혼자 힘으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중이었다. 할 줄 아는 일은 사실 참 많았다. 돈 때문에 나를 많이 미워했는데, 당연했다. 난 국가장학금도 전액이 나오는 부동의 1 분위, 차상위계층 경력직인 흙수저다.
남에게는 밥을 종종 사도 나에게는 박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외롭게 때우는 것이 아니라 데이트처럼 즐겨본 적은 없다. 필요한 걸 산 적은 있어도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자책 없이, 계산 없이 날 위해 쓴 적은 없는 것 같아서 나와 화해하는 마음으로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이제까지 긴 학생 시기를 보내며 식당 알바며 패스트푸드점이며 쉼 없이 일해서 모은 돈이 모자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소액이지만 주변에서 내 돈을 빌려가기까지 했었다. '맨날 걱정만 사서 하고, 막 써서 진짜 모자라는지 볼까'하는 삐딱한 마음으로 길을 나서서는 굳이 카페에 가서 음료에다 빵까지 사 먹고 얼마 안 있어서 나왔다. 스티커도 사고 문득 영화관이 보여서 영화표도 할인 없이 결제했다. 콤보 세트도 자그마치 라지로 결제했다. (다 먹지도 못했다.) 4만 원. 밤 11시까지 돈 생각 없이 돌아다닌 값이었다. 꽤나 행복했다. 모든 걸 내가 결정하고 사치란 사치는 다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단 괜찮네. 이 이상으로는 더 써도 즐겁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미안해 몰랐어. 너 사치스럽지 않은 거 이제 알았으니까 이제 나쁘게 말하지 않을게 좀 봐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나를 대접하는 건 이렇게 가치 있구나.
그럼 이 참에 여행도 진짜로 혼자 가 볼까?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스카이스캐너를 켰다.
가장 싼 날짜와 호텔을 알아보고 1시간 만에 비행기와 숙박을 결제했다.
아까 본 건 뻔한 멜로 영화였다. 정말 오랜만에 이상화된 사랑 영화를 보며 유치한 대사에 울다가 잘 헤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한한 인간인 주제에 감히 ‘영원히‘를 바랐다. 하지만 아주 작은 시련에도 나를 놓을 예정임을 선명히 보여준 그에게 나는 아예 더 이른 이별을 안겨주고 떠나왔다.
이제 난 혼자니까, 기대지 않고 살아가려면 나 자신과 싸우고 지낼 수 없을 것이다. 20대 내내 미워했으면 충분하다. 이제 더는 그렇게 지낼 힘이 없다.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생각하면 좀 달라질까 싶었고, 동시에 장소만 바뀐 데서 돈 쓰고 돌아온다고 뭐가 바뀔까 싶기도 했다.
여행지를 정하고 제일 큰걸 다 결제했으니, 가서 뭘 할지 예산부터 짜봤다. 일어나서 밥, 관광지에는 예쁜 카페가 많을 테니 넉넉하게 두 번까지 허용한다 치고 카페, 또 밥, 입장권 대충 1~2만 원. 하루에 5~7만 원 정도면 될 것 같았다. 체크카드를 챙기며 통장에 3일 치의 경비를 채워놓고, 혹시 선물이나 기념품을 살지도 모르니 여기서 10만 원 정도는 더 초과해도 상관없겠다고 정했다. 이왕 여행 가는 거, 너무 아끼고 후회하긴 싫었다.
출발 전 며칠 동안 막상 계획을 짜려니 귀찮아져서 계속 미뤘다. 그래도 비행기를 이미 결제해 둬서 든든했다. 이걸 번복하거나 변동할 일은 없으니 무언가 진행되는 느낌에 조금 설렜다. 부산에는 한 번 가봤다. 갈 곳 대충 알겠지 싶어서 성의 없이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슥슥 내리며 다 읽지도 않고 괜찮아 보이는 곳들, 전에 좋았던 곳과 못 갔던 곳들을 지도에 저장해 뒀다. 광안리, 해운대 두 곳을 가기로 했다.
난 저질체력으로 유명하니까 아주 넉넉하게 짜야지.
아주 중요한 몇 군데만 집어넣고 나머지는 시간 남으면 가기로 했다. 영업시간 같은 것만 체크해 뒀다. 걷는 걸 좋아하니까 가방은 무조건 가볍게 챙기고, 쓸데없는 거 다 빼자. 숙소 체크인부터 하고 돌아다녀야지. 나에 대한 몇 안 되는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몇 가지 디테일을 챙겼다.
누굴 만나든 상대방에 맞춰주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나를 드러내는 게 두려웠다. 누군가와 부딪치기 싫은 마음에 처음부터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고 순응적인 태도를 보였고 난 내 요구사항도 잘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려 여행씩이나 가기로 혼자 결정해서 모든 걸 내가 선택하자니 전에 없이 새로웠다.
아무리 사소한 고민을 하든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가 우유부단하게 정하고 갈팡질팡, 뭐든 후회하던 나였다. 굳이 후회를 만들어서 한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 많은 걸 다 정해야 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유독 누구랑 연락도 잘 안 하고 칩거하던 때였다. 혼자가 외롭지만 생각보다 편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건 어떻냐고 물어볼 일도 없이, 허락받을 일도 없이 진행했다. 이제야 내 삶을 사는 느낌이었다. 책임만 지고 선택권을 자꾸 남에게 위임했던 걸 그제야 발견하면서,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나에게 한 번 더 사과했다.
삶을 끌려가듯 산 거 진심으로 미안해.
며칠이 지나 드디어 여행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공항철도 밖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역시 난 여행을 갈 때마다 날씨가 좋다니까. 괜히 날씨요정이라고 불린 게 아니지. 백팩 하나만 달랑 챙긴 단벌신사는 그렇게 여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