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도 절교할 일은 생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by 문지

아침에 알람을 몇 번씩 꺼 가며 힘겹게 눈을 뜨니 창 밖이 어두웠다.
‘비가 올 거면 시원하게 오고 그쳐버리지, 수증기처럼 이렇게 흩뿌릴 일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근로지로 향했다. 이상하게도 연관된 일도 없는데 아침부터 그 친구와 관련된 일이 생각났다.

우리는 16년간 친구였다. 작년에 끝났지만. 사실 그렇게 꽉 차게 열띤 우정을 나눈 건 아니었고 잊을만하면 연락해 보고 또 잊고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만나는 식이었다. 우리의 만남 주기는 그 정도가 적당했다. 몇 달에 한 번 정도. 이상하게 자주 만나면 마음 상할 일이 종종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마음이 상한 걸 표현조차 못했던 걸 보면 나는 이 친구를 조금 무서워했던 것 같다.

이 친구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때의 나는 항상 그랬다. 눈치 보고, 나를 떠날까 무서워하고, 연락이 늦으면 내가 소중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불편한 감정이 들어도 표현하면 싫어할까 봐 꾹 눌러 참았다. 그런 시절을 오래 겪다가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서 지금은 좀 편해졌는데, 이상하게 그즈음 싸워서 이 친구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변한 내 모습을 보여줄 뻔했는데 아쉽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우리 인연이었나 보다.

오래 지속된 인연이 그렇듯 안정감과 무딘 마음이 꽤 컸다. 갑자기 끝나버리니 그제서야 벼락치기 하듯 지난 일을 되짚어 보게 된다. 그 안을 헤매다 보면 어떤 일들에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나다가도, ‘나쁜 애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우리는 오해가 너무 많은 사이가 아니었나. 하긴 별 뜻 없었을 수도 있겠다. 나도 예민했었지.’로 보통 정리된다. 어느 순간 익숙해져서 관계를 더 개선할 노력을 안 했던 건 아닌지 싶어서 복잡한 생각이 든다.

멋있는 친구였다. 항상 당당했고 하고 싶은 걸 끝까지 밀어붙였으며 내게 없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늘 내 옆에 있었다. 지독하게도 어둡고 힘들었던 날에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였다. 내가 조울증으로 입원했다가 치료가 덜 끝난 채 퇴원했을 때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받아낸 친구였다. 아직까지도 고맙고, 별 소리 다 했던 것 같아서 미안하다.

나는 글, 그 애는 그림. 우리는 작가라는 같은 꿈을 꾸었다. 내가 처음으로 완성한 많은 글들의 독자였다. 빈말로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 애의 후한 평가가 왠지 작가가 될 자격을 얻은 것 같아서 기뻤다. 글 관련 소식은 늘 그 애에게 말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현실이 무서웠고 내가 감히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몇 년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자격을 의심했다. 내 말들이 끼치는 영향이 두려웠다. 그러다 작년쯤이었나, 글을 다시 쓸까 한다 말하니 무엇이든 선택은 내 몫이지만 가급적이면 쓰는 방향이면 좋겠다고 했다.


브런치 작가 심사를 통과하고, 처음으로 브런치북을 꾸준히 연재한 최근에 나는 이걸 이제는 자랑할 수 없어 쓸쓸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충분히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의 지난 삶을 알며, 직접 읽어보고 영감을 주거나 어느 부분이 좋았고 어디가 아쉬웠다고 하는 말을 나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글을 포기하다 시도하길 반복하는 동안 그 애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한 번도 그만둔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나를 소재로 작품도 만들었다. 나를 촬영한 원본까진 받았는데 그 결과물을 나는 보지 못했다. 다음에 보여준다고, 보러 간다고 했던 때만 해도 이런 끝을 예상하진 못했었다.

그렇게 싸우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네가 안 그랬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을까? 하지만 언젠가 네가 조언했듯이 If를 생각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좋았던 순간, 고마웠던 순간과 서로에게 실망했던 때가 한 데 뒤섞여 뿌옇게 흐려진 흙탕물 같은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가라앉고 말간 그리움만 남게 되길. 언젠가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다시 만나든, 혹은 이별이 최고의 선택인 양 각자의 자리에서 앞다투어 행복하든. 함께 했던 시간들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되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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