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려고 쓴 이별의 편지

을의 연애의 끝

by 피연

잘 지내지? 저번에 얘기했던 것도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정신없는 학기지만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끝까지 잘 견딜 거야.

맨날 수학 얘기만 했는데 오늘은 잠깐 다른 얘기 좀 할게.

우리가 그래도 사귀었던 사이잖아. 그래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지 않고 이렇게 잘 지내는 게 참 다행인 것 같아.

내가 결코 끝내자는 말을 함부로 뱉은 건 아니야. 그때의 내 생각과 판단은 그게 최선이었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이전에도 말했을지도 몰라. 지난 1년은 내가 없었다고. 널 너무 좋아한 나머지 우선순위까지 뒤바뀌었었다고.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계속 만난다고 해도 결혼까지 못 갈 게 확실하다면 헤어져달라고 했었지.


그 판단은 맞았어. 내가 없는 사랑은 성립할 수가 없더라고.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니 내가 그때 서운했던 것들이 과연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야만 했을까 의문이 들더라. 충분히 다른 여지가 있었는데..

물론 너도 진짜 너무했어. 어쩜 그렇게 무심했니? 이 부분은 너도 못해준 거 많이 생각났다고 미안하다고 했으니 더 뭐라고 하지는 않을게.


우리 지금 진짜 웃긴 거 알고 있지? 헤어진다고 울고불고하더니, 다시 같이 공부하고. 너는 얼마 전에 나 차단까지 했었다가 내가 뭐라고 하니까 다시 풀었잖아.

나는 그때까지도 너한테 미련 가지고 있어서 요새는 괜찮은지 물었고, 너는 잊었다고 괜찮다고 하며 몇 마디 했고.. 나 그 문자 받고 울었어. 놀랍지도 않지? 3시간 후에 너무 네가 매정하게 말한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래 좀 매정하긴 하더라.


네 말대로 재회는 힘들 거야 우린. 나도 잘 알고 있어. 근데 그냥, 너는 내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괜히 아쉽더라. 내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나도 웃기지? 나도 내가 어이없어.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지. 헤어지자는 말을 본의 아니게 남발해 버렸어. 진짜 바보 같아.


차라리 나 차단한 김에 내가 문자를 보내든 말든 반응 안 했으면 나도 기분은 상해도 받아들였을 텐데. 이상해.

아니, 받아들인 건 맞아. 그냥 자꾸 함께한 기억들이 맴돌고 있을 뿐이야.


나 말이야, 베푸는 게 부담이었으면 그냥 안 베풀어버리면 됐는데. 아니면 기대를 안 했으면 됐는데. 반쪽짜리 베풂이었더라.


네가 내 연락을 자꾸 받고 인사를 해서, 자꾸 잊을만하면 눈앞에 나타나서. 아직도 이러고 있어.

결혼할 남자 찾으려면 29살은 시간이 지는 않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니야. 근데 그냥, 애초에 결혼하겠다는 마음이 너 때문에 들었거든. 분명 얼굴을 보고 말하면서 걷는데 늘 잡던 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내가 무슨 허상을 바랐나, 싶더라.


아냐,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또 서운해할 거야. 네가 궁금한데, 너는 날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무서워하고, 또 우선순위가 내가 아니라 네가 될 거야. 그러니 우린 그때까지가 맞았어.


긴 학기가 지나가네. 겹치던 수업 하나가 오늘 종강했잖아. 매주 널 좋든 싫든 마주치면서 언제는 반갑고, 또 언제는 밉고, 너를 만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날이 있었나 하면 그 반대로 침대에 누워 엉엉 울던 날도 있었어. 헤어진 애인은 절대 안 만나야 한다는데, 우린 그런 당연한 원칙 하나까지도 안 지켰다. 그렇지?


나는 이제 너한테 연락 안 하려고. 아마 너도 그렇겠지만.

아, 강의 자료 네가 만든 거 의리 있게 끝까지 보내줘서 고마워. 다른 과목도 다 종강하고 나면 정말 볼 일 없겠구나.


그래도 이렇게 시간이 지난 게 다행이야. 겨울에 그렇게 끝나고 한 번도 안 봤으면 내가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 감정이 고여있지 않고 온전히 다 맞아내서 그런가? 이젠 별로 안 아파.

부디 우리 둘 다 다음 사랑은 아프지 않게 하자. 이렇게 만신창이로 둘 다 얻어터져서는 회복도 이상하게, 인사도 만남도 이상하게 하지 말고 좀 평범하게 하자. 어차피 네가 연애하는 사진은 못 볼 거야. 네 카톡 지웠거든.


다음 여친한테는 좀 잘해줘. 좀 질투 나긴 한다. 너랑 나랑 안 맞는 걸 어쩔 순 없지만. 너에게 내가 너무 간절히 바랐던 아주 사소한 것들을 그 사람은 다 가질 걸 생각하니까.


그래도 있잖아, 이제 우리 헤어진 지 6개월이 지나서야 좀 실감 나게 이별을 받아들였거든. 지난 몇 개월 동안 뒤돌아보느라 몰랐는데, 나 자신한테 엄청 잘해주면서 갖고 싶은 것도 사고, 친구들도 만나고 책도 읽고 먹고 싶은 것도 먹으면서 행복했더라. 작년 이맘때엔 정말 자주 울었던 것 같거든. 건조해진 피부에 로션을 펴 바르며 아직 다 나가지 못한 울음의 호흡을 힘들게 몰아쉬었어. 요새 난 행복해. 피부도 더 좋아졌어.


우리 마지막 말을 너무 많이 했다. 그래서 마지막이 너무 많아서, 그 뜻을 잃어버렸다 그렇지? 그러니까 이게 끝이라고 해봤자 별로 와닿지도 않겠네.

나는 아마 졸업하고 2년 안에 외국에 나갈 거야. 너는 여기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 그리고 몇 년 지나면 또 삶의 어떤 단계를 지날지 모르지.


그때까지 함께한 기억들 잘 개어서, 잘 잊고 잘 흐려지게 만들어서 우리 마음 아주 깊은 곳에만 고이 묻어두자. 힘껏 피해 다니고, 서로의 흔적을 힘닿는 대로 외면하자.

그리고 그 힘 모두 모아서 다음 사랑에게 주자. 약속할 수 있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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