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겨울, 삭풍이 뼈 속까지 시리게 스며드는 수원 장안구의 허름한 연립주택가. 낡은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가 마치 늙은 개의 헐떡거림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그 적막을 깨고 119 상황실의 벨이 굉음을 토해냈다.
"장안구 연립주택 2층, 심정지 환자 발생! 즉시 출동!"
신고자의 목소리는 찢어지는 듯 절박했다. "아빠가 숨을 안 쉬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수원소방서의 젊은 구급대원 김영철(가명)은 무전 내용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벌써 몇 번째 심정지 환자 출동인가. 그는 낡은 방화복을 허둥지둥 걸쳐 입으며 속으로 외쳤다. '이번엔 반드시 살려야 한다!'
사이렌 소리가 찢어지는 듯 고요한 새벽을 갈랐다. 낡은 구급차는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좁은 골목길을 질주했다. 영철은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도 잊고 심호흡을 했다. 그는 얼마 전부터 교육행정직으로의 전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격무와 위험한 현장 출동에 지쳐가던 그는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며 틈틈이 책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오직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연립주택 앞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낡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뛰쳐나온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영철은 동료 대원과 함께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뛰어오르는 그의 이마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방문이 활짝 열린 낡은 방 안, 젊은 여성이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 남성에게 필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 그리고 두려움과 절박함이 뒤섞인 눈빛. 1980년대 중반, CPR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에 일반인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영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보건대 학생이라고 했다. 영철은 희망을 느꼈다. '그래, 조금만 더 버텨줘… 내가 반드시 살려낼 테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영철은 다급하게 외치며 여성과 자리를 교대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굳어버린 환자의 흉곽을 힘껏 압박하는 그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하나, 둘, 셋… 촌각을 다투는 긴장감 속에서 시간은 멈춘 듯 흘러갔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환자의 가슴이 미약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희망의 빛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환자가 얕게나마 호흡을 되찾고, 희미하게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아빠! 아빠!" 딸은 울먹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영철은 환자의 얼굴을 닦아주며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문제는 환자를 2층에서 안전하게 이송하는 일이었다. 당시 구급대원은 단 두 명뿐이었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철은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환자를 조심스럽게 1층으로 옮겼다. 영철은 환자를 구급차에 싣고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구급차가 응급실 앞에 멈춰 선 순간, 무전기에서 또 다른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원대학교 후문 자취방, 연탄가스 중독 환자 2명 발생! 즉시 출동!"
숨 돌릴 틈도 없이, 영철은 다시 출동해야 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마치 전쟁터의 굉음처럼 느껴졌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소방관이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수원대학교 후문 근처의 낡은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좁은 방 안에는 매캐한 연탄가스 냄새가 가득했고, 두 명의 젊은 청년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 주변에는 검은 구토물이 묻어 있었고, 몸은 축 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영철은 망설일 틈도 없이 장갑 낀 손으로 청년들의 입 주변을 닦아내고 곧장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번갈아 가며 한 명씩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넣었다. 폐 속의 산소가 바닥을 드러내는 듯했지만,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온 힘을 다했다. 그는 자신의 입술이 닿는 차가운 입술에서 희미한 온기를 느끼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두 청년을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한 후에야 영철은 온몸의 피로를 느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손발은 덜덜 떨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구급차에 올라탔다. 신혼이었지만,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며칠 밤낮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눈은 퀭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는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그는 안정적인 근무 환경과 규칙적인 생활을 꿈꾸며 교육행정직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런 험난한 삶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소방서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저, 혹시… 기억하세요?"
돌아보니, 아까 심정지로 쓰러졌던 남성의 딸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빠가 선생님 덕분에 살아나셨어요." 그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다시 응급실로 간 영철은 환자의 손을 잡았다. 차가울 것 같았던 손은, 놀랍게도 따뜻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환자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의 눈에는 감격에 겨운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순간, 영철은 깨달았다. 어떤 직업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이 이렇게 가슴 벅찬 감사와 감동을 안겨줄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느껴왔던 고통과 회의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 그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날 이후, 영철은 교육행정직 시험을 포기하고 소방관으로 더욱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더욱 강도 높은 훈련을 자처하며 화재 진압 기술과 응급처치 능력을 연마했다. 그는 소방 승진 시험에도 매진하여 마침내 꿈에 그리던 소방 간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영철은 마침내 소방서장으로 정년을 맞이했다. 그의 퇴임식 날, 그는 수많은 후배 소방관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길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정년퇴직 후에도 영철은 소방 관련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후배들을 양성하고, 화재 예방 교육을 진행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며,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느덧 그는 손주를 보게 된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1985년 겨울, 심정지로 쓰러졌던 남자의 따뜻한 손, 그리고 딸의 감격에 찬 눈물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날, 그 손끝에서 전해진 따뜻한 온기는 그의 삶의 방향을 영원히 밝혀주었다.
그는 그 온기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숭고한 소방관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진정으로 삶을 구하는 순간, 삶의 길을 찾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