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무난하게 끝났다.
논쟁은 없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말로 다음 일정을 잡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준비해 둔 선물을 건넸다. 과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고른 물건. 상대는 웃으며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날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며칠 뒤, 상대 회사 실무자와 후속 조율을 하다 들었다.
"대표님, 내부에서 이 건은 조금 천천히 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유를 묻자, 명확한 답은 없었다.
"크게 문제는 없는데요. 급한 건은 아니라서요."
나중에 다른 경로로 들은 이야기.
"그 회사는 거래 상대라기보다는, 관계를 잘 챙겨줘야 하는 쪽 같더라고요."
그 판단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선물은 관계를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다.
관계를 정의하는 행위다.
의전에서 선물은 두 가지 타이밍에만 존재한다.
하나는 관계가 이미 확정된 뒤.
공급사-발주사, 파트너-파트너, 서비스 제공자-클라이언트.
역할이 명확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선물은 확인이다. "우리는 이런 관계입니다"라는.
다른 하나는 관계가 아예 필요 없는 자리.
국빈 방문, 정상 회담, 공식 리셉션
선물이 프로토콜 그 자체인 상황. 이때 선물은 형식이지, 관계가 아니다.
문제는 그 사이.
역할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협상 초반.
이때 선물을 먼저 건네는 쪽은, 자기도 모르게 관계의 방향을 제시한다.
얼마 전, 한국 중견기업이 독일 자동차 부품사와 첫 협상을 했다.
접견은 프랑크푸르트 본사에서. 1시간 반 동안 기술 사양과 공급 조건을 논의했다. 양측 모두 진지했고, 추가 논의 의지도 있었다.
회의 끝에 한국 측 대표가 선물을 건넸다. 청자 다완. 명장의 개인 소장품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독일 측 구매 책임자는 놀라워했다. 감사 인사도 정중했다.
"이런 걸 받아도 되나요?"
한국 대표는 웃으며 답했다. "한국에서는 좋은 관계를 기대할 때 드리는 겁니다."
2주 뒤, 독일 본사에서 내부 회의가 있었다.
구매팀이 아니라 컴플라이언스팀이 소집한 회의였다.
"이 회사와의 거래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구매 책임자가 답했다. "아직 조건 협상 단계입니다."
"그런데 선물을 먼저 줬다?"
"예. 한국 문화라고 하더군요."
컴플라이언스 책임자가 메모를 했다.
"이 케이스는 특별 관리 대상으로 분류합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문서로 남기고, 구두 합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협상은 이어졌다. 하지만 속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제안에 법무 검토가 붙었고, 사소한 조건 변경에도 본사 승인이 필요했다. 6개월이 지나도 계약서 초안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 대표는 이해하지 못했다. "기술도 좋고, 가격도 경쟁력 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겁니까?"
독일 측 실무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본사에서 이 거래를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공급 계약이 아니라, 특수 관계 관리 건으로요."
선물이 관계를 정의하는 방식은 이렇다.
대등한 협상에서 한쪽이 먼저 선물을 건네면,
상대는 이 관계를 대등함이 아니라, 비대칭으로 읽기 시작한다.
비대칭은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우위'.
상대가 관계를 원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조건을 더 따져봐도 된다.
다른 하나는 '리스크 관리 필요'.
이 상대는 거래 논리가 아니라 관계 논리로 움직인다. 컴플라이언스 이슈가 될 수 있다. 모든 절차를 더 엄격하게 가져가야 한다.
둘 다 협상에 독이다.
선물 하나로 모든 게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물 하나로 이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분류는 끝난다.
거래 파트너에서 관계 관리 대상으로.
협상 테이블에서 특별 케이스로.
그 분류는,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