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청소하는 걸 보는 게 내 놀이야,-
공동육아 터전 소청소 날이었다.
두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아빠 차례.
주말 아침, 다른 가족들이 늦잠을 잘 시간에 나는 걸레를 빨고 있었다.
고무장갑 안에서 손이 쪼글쪼글해질 때마다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래도 이곳에서 아이는 자유롭게 자라잖아.
나는 그 문장을 믿고 싶었다.
자유.
요즘 부모들이 가장 많이 말하고, 가장 갈망하는 단어.
자유롭게 놀게 하고 싶었다.
틀에 가두지 않고, 결과를 요구하지 않고,
아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동육아를 선택했고,
그래서 주말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날,
아이는 다섯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기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무 조각을 쌓지도 않았고,
천을 두르고 상상의 나라를 만들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처음 한 시간은 괜찮았다.
피곤한가 보다 했다.
두 시간이 지나자 불안해졌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세 시간이 지나자 초조해졌다.
왜 안 놀지?
다섯 시간이 되자 화가 났다.
“왜 놀이 안 해?!!!!!! 여긴 네가 매일 노는 곳이잖아 ”
나는 결국 놀이를 지시했다.
자유를 선택한 부모가
놀이를 강요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말이 없었다.
눈빛이 잠시 흔들렸고,
나는 그 눈빛을 외면한 채 걸레를 더 세게 짰다.
집에 돌아와 다시 물었다.
“왜 오늘 아무것도 안 했어?”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어제 열이 나서 힘들었어.”
그리고 잠시 후, 이렇게 덧붙였다.
그 순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놀이란 움직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놀이란 창조여야 한다고 믿었다.
놀이란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라고 정의해 두었다.
하지만 아이의 놀이에는 결과가 없었다.
그저 바라봄이 있었다.
아빠가 공간을 닦는 모습을 보는 것.
일주일을 머무는 터전을 정성껏 정리하는 손길을 지켜보는 것.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을 어른이 사랑으로 돌보는 장면을 눈에 담는 것.
그것이 아이의 놀이였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아이의 놀이를 걱정한 게 아니었다는 걸.
나는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를 보고 싶었던 거였다.
쌓인 블록.
완성된 작품.
활발한 움직임.
보이는 결과는 나를 안심시킨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가만히 있는 아이는
내 불안을 자극한다.
혹시 뒤처지는 건 아닐까.
혹시 발달이 늦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잘못 선택한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놀이를 재촉했다.
아이를 위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요구였다.
그날 이후 나는 묻게 되었다.
아이의 가만히 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관찰은 수동이 아니다.
관찰은 가장 깊은 몰입이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리듬을 배우고 있었을지 모른다.
걸레가 바닥을 미는 소리,
물통이 흔들리는 소리,
의자가 옮겨지는 소리.
그 반복 속에서
질서와 노동의 감각을 몸에 저장했을지 모른다.
아이는 만들지 않았지만
관계를 보고 있었다.
아빠가 시간을 내어
자신의 공간을 닦는 장면.
‘나는 소중한 공간에서 살고 있구나’
‘어른이 나의 자리를 돌보고 있구나’
그 메시지는 말보다 깊게 스며든다.
놀이란 반드시 손이 분주해야 하는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놀이란 세계를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그날 놀고 있었다.
다만,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는 자주 아이의 놀이를 정의한다.
이렇게 놀아야 하고,
이 정도는 만들어야 하고,
적어도 뭔가는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알고 있다.
놀이가 무엇인지.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는 아이를
‘멈춤’으로 볼 것인가,
‘확장’으로 볼 것인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낭비’로 볼 것인가,
‘성장’으로 믿어줄 것인가.
육아는 어쩌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나의 불안을 내려놓는 훈련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다.
그리고 놀이의 정의는
어른이 정할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날, 아이는 말했다.
“아빠가 청소하는 거 보는 게 놀이야.”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다.
놀이가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놀이를 믿어주는 것,
그 믿음이 아이를 자유롭게 만든다.
아이의 놀이는 무한하다.
부모의 불안은 유한해야 한다.
그 균형 위에서
비로소 자유는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