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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울지 않아도 된다

독서일기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문학동네)

by 서정아

삶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일찍 알아채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미 멀리 와버리고 나서야 생각하게 된다. 내가 꿈꾸고 바라보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린 걸까, 하고. 그런 자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면 우리는 그동안 꿈꾸었던 것들을 어린 날의 치기였다며 부정하거나, 현실을 애써 아름답게 포장하기 일쑤다. 누군가는, 도무지 부정할 수도 포장할 수도 없어서 그저 절망하고 비관하고 슬픔에 빠지고 만다.


모국의 아름다운 언어를 사랑하며 한 단어 한 단어 곱게 닦아 잇대어보곤 하던 시인이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으로 잘 알려진 백석 시인이다. 그는 해방 이후 고향인 북한에서 문예 활동을 하지만,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1960년대 무렵 양강도로 추방되어 협동농장에서 농부이자 양치기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언어의 세계, 문학의 세계에서 떠나야 했던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백석은 자신이 쓰고 싶은 시를 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문학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써 보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두터웠다. 북한 문단은 백석에게 당의 이념을 인민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글만을 쓰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양강도로 추방되어 양치기 일을 하며 혼자서 몰래 한 편의 시를 쓴 다음 혼자 소리 내어 읽고 그것을 불태워버리는 소설 속 백석의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마냥 슬퍼진다.


그러나 언어가 있는 한 모든 것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는다.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꿈의 경로에서 멀리 벗어나버린 이들을 그렇게 위로하는 것 같다. 설령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우리가 꿈꾸었던 일들이 그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백석이 잃어버린 세계를 현 시대의 작가인 김연수가 복원하고 그것을 우리가 읽는다. 백석은 소설 속에서 또 한 번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있고, 그 언어는 결국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아직은 울지 않아도 된다.


* 2023년 8월 부산 연제구청 소식지에 수록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합니다.


일곱해의마지막.jpg


책 속에서


- 이 날짜만 그대로 두고 책에 실린 자음과 모음을 해체해 다시 조립한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1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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