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고 쓰다

작지만 구체적인 기쁨

독서일기 『오웰의 장미』 (리베카 솔닛, 반비)

by 서정아

집에 씨앗을 몇 종류 구비하고 있다. 정원이나 텃밭은 없고 기껏해야 비가 새는 작고 낡은 베란다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꼭대기 층인 관계로 볕이 잘 들어 화분 식물 키우기에 나쁘지 않다. 간혹 배달 음식을 시키면 생겨나는 플라스틱 용기 바닥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화분을 만든다. 요즘 배달 용기들은 일회용으로 쓰기엔 너무도 튼튼하고 퀄리티가 좋은 것 같다. 화분으로 쓰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바질 씨앗은 대충 뿌려놓아도 쑥쑥 잘 크는데, 그 신선한 잎들은 훌륭한 샐러드 재료가 되기도 하고 허브차로 마셔도 좋다. 이파리 몇 개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냄새를 맡으면 기분전환도 된다. 새로운 씨앗을 뿌려놓고 조만간 연둣빛으로 올라올 싹을 기다리는 마음은, 무척 작지만 구체적인 기쁨이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설렘이다.


폭력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이와 같은 기쁨을 찾는 일이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는 것을,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는 섬세한 글쓰기로 보여준다. 이 책은 작가 조지 오웰의 장미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다양한 주제의 사유를 넓고도 깊게 펼쳐나가는 훌륭한 에세이집이다. 윤리와 아름다움은 얼핏 보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윤리적인 행위가 될 수 있고, 식물 하나를 심는 것이 투쟁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원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던 오웰의 낯선 모습에 대해 리베카 솔닛은 불교 우화를 인용해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호랑이에 쫓겨 달아나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데, 작은 식물을 붙잡은 덕분에 가까스로 추락사를 면한다. 그 작은 식물, 곧 가느다란 딸기풀은 차츰 뿌리가 들려 금방이라도 뽑힐 것만 같은데, 그 끝에 탐스럽게 잘 익은 딸기가 한 알 달려 있다. 우화는 묻는다. 그 순간에 해야 할 옳은 일은 무엇인가? 정답은 딸기를 맛보는 것이다.’

위태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잘 익은 딸기 한 알을 맛보는 기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작은 희망이 아닐까.


* 2023년 5월 부산 연제구청 소식지에 수록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합니다.


오웰의 장미.jpg


책 속에서


-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마치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 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 (72p)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삶은 그렇게 흘러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