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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쓰다

무지(無知)라는 변명

독서일기 『각각의 계절』 (권여선, 문학동네, 2023)

by 서정아

한 계절이 또 지나가고 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라는 단편에서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114p)’ 든다. 올 겨울을 나면서 우리 각자가 견뎌야했을 일들, 그리고 그 견딤을 위한 ‘각각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알기 어려운 것인가. 누군가의 마음을 오해 없이 알아챈다는 것도, 내 진심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달한다는 것도 말이다. 어떤 시기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내내 고민하고 때론 괴로워하며 한 계절을 보내는 데 힘을 들였다.

나는 늘 스스로를 예민하다고 여겨왔고, 그 예민함으로 인해 상대방의 말이나 표정이 함의하는 바를, 사소한 행동에 숨은 진의를 잘 알아채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다만 작은 소리에 민감했고, 미묘한 변화들을 쉽게 감지할 뿐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남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미세한 진동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나에 대한 타인의 미묘한 태도 변화를 쉽게 알아채거나 그런 일들. 결국 나는 내가 받을 상처, 그로 인한 내 감정의 문제에 주로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나 진동에 담긴 의미, 상대의 말이나 행동 속에 숨은 진의를 제대로 알아챘던 걸까 하고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좀 더 치열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해서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라는 단편에서 주인공 오익은 여동생 오숙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분노하며 의절을 통보했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며 무언가를 계속 원하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한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간과한 것들, 그것이 자신에게 화살로 돌아온다. 그러면서도 오익은 억울해 한다.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199p)’라면서. 몰랐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무지(無知)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걸까?

정확하고 직설적인 단어로 말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뜻을 파악하는 것, 어렵더라도 스스로 깊이 생각해 그 뜻을 알아채고 중요한 함의를 간과하지 않는 것, 그것은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의 기본 자세이다. 그리고 문학과 삶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면, 문학에 대한 자세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자세 역시 그렇게 갖추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담긴 의미를 간과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줘 놓고 무지를 변명 삼아 발뺌하는 건 무책임하다.

오익은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인 듯한 ‘새 세 마리’라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어떤 의미와 암시를 담은 말인지 생각하기 시작하고, 나중엔 ‘파흣키에에, 궤헤그르르’와 같이 언뜻 무의미하게 들리는 이런 소리들의 의미도 찾아내려 애쓴다. 얼핏 보면 뭔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 소리들은 무의미한 소리들의 조합일 뿐이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궤헤그르르’라는 소리가 개회 그릇인지, 계륵인지, 개굴인지, 궤에 그릇이 들었다는 뜻인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의절을 선언한 여동생과 자신을 괴롭히는 어머니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끝내 맞닥뜨려야 할 누군가의 진심을 회피하고 무의미한 언어유희 속으로 숨어들고 싶은 오익의 태도는 사실 그동안의 내 비겁함과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겨울의 끝자락이다. 이 겨울을 보내면서 나에게 필요했던 힘을 오직 스스로에게로만 수렴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서 끊임없이 작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 타인들의 소리에도 세심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으로 키워나가고 싶다. 나의 굼뜬 움직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봄은 오고 있을 테니까.


책 속에서


- 나는 그의 눈빛, 그의 경청에서 그가 나를 흥미진진하게 읽고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서히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으로는 혹시 그가 내 내부에서 치명적인 진실들을 캐낼까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서 아무것도 캐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 둘은 아마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웠던 건 내가 그를, 경서라는 인간을 도저히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었다. (219p 「기억의 왈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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