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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매 Jul 11. 2023

EP 02. 인생 첫 트로트 콘서트장에서 배운 것들

여기, 보통 공연장이랑은 확연히 다르다.

29년 인생 처음으로 트로트 콘서트장에 다녀왔다. '덕질 빼면 시체'였던 나는 뮤지컬, 클래식, 댄스, K-POP 등 별의별 장르의 공연장은 모두 섭렵했다고 자부하지만 트로트는 정말 처음이었다. 솔직히 내가 가고 싶어서 엄마와 동생을 꼬드겼지만 주변에서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볼 때마다 "엄마를 위한 효도 차원에서.."라며 말을 얼버무리곤 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이 낯선 현장에 가보기를 원했던 건 바로 나였다.


무려 15만 4천 원이나 내고 티켓을 예매했다. 콘서트를 보러 가기 2주 전부터 출퇴근 길에서도, 야근할 때에도 공연에 나올 법한 트로트 곡들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토록 예습에 철저한 관객이라니. 자고로 콘서트란 아는 가사 모르는 가사 다 끌어모아 따라 불러야 제맛 아닌가. 공연 전 날, 무엇이든 다 따라 부를 준비가 되었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수 천 명의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따라 부를 수 있다 자부했다.


하지만 콘서트 당일, 나는 올림픽공원에 도착하자마자 그간 준비한 모든 것들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아주머니 팬들은 나와 같이 몇 안되는 20대 팬들을 기특하고도 신기하게 바라 보았고, 나는 오히려 그런 그녀들이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여기, 내가 와도 되는 곳일까? 내 친구들이 트로트를, 이 장르를 사랑하는 나를 희한하게 여기던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일까?



아가씨, 누구 좋아해?

9호선을 타고 올림픽공원역에 가던 나에게 모르는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이거 타면 콘서트장 갈 수 있어요? 트로트. 콘서트. 00 나오는거."


대전에서 아침 8시 30분 버스를 타고 올라온 67세 아주머니는 초행길이라는 수줍은 고백과 함께 이제껏 좋아했던 트로트 가수 목록을 읊어주셨다. 현재 최애와 과거 최애 그리고 안좋아하는 가수까지 모두 다. 결론적으로는 "아가씨는 누구 좋아해?"를 묻고 싶으셨던 듯하다. 그리고 그 답이 본인의 최애이기를 바라셨겠지. 역시나 내 손을 꼭 잡으며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가수를 좋아해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


이런 대화는 공연이 끝나는 순간까지 반복되었다. 일단 현장에 '아가씨'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눈에 잘 띌 수밖에 없었는데 아주머니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붙잡으셨다. 그리고는 엄마랑 왔는지, 첫째 딸인지, 몇 살인지 간단한 호구조사를 시작했고 항상 결론적으로는 "누구를 제일 좋아하냐"는 아주 노골적인 질문을 했다. 물론 나처럼 최애가 없으면 혼날 수도 있다. 그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얼마나 열렬히 애정하면 처음 보는 아가씨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지.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두 손을 모아 부끄러워 하며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지. 매사 호기심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보내는 팬심과는 어딘가 결이 다르게 느껴졌다. 아들뻘, 조카뻘 되는 가수들을 조건 없이 예뻐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외치고 공유하는 그 현장이 낯설고도 벅차게 다가왔다.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아들처럼 여기며 세상 사람 모두가 알아주고 예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뭉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아이돌 가수들이 팬들에게 친구이자 애인 같은 존재라면, 젊은 트로트 가수들은 그야말로 매일 테레비로, 유튜브로 볼 수 있는 또 한 명의 자식 같은 존재가 맞았다. 장사하던 어머님, 전업주부로만 살았던 어머님,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셨던 어머님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엄마들이 트로트 앞에서만큼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게 되는 광경이라니. 마치 선거운동을 하듯이 무지개빛 티셔츠를 갖춰 입고 광장에서부터 노래하며 춤 추는 모습은 참 낯설면서도 정겹게 느껴졌다.



우리 엄마, 이런 사람이었어?

엄마가 '내가 모르던 사람'처럼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엄마는 트로트 오디션이 시작된 이후로 콘서트 당일 아침까지도 태블릿 PC로 밤낮 가리지 않고 들었던 노래를 또 듣고, 봤던 영상을 또 봤다. 인스타그램에 좋아하는 가수가 글을 올리지는 않았는지 매순간 살펴보았고 대뜸 가수의 사진을 캡처해 보내기도 했으며 팬카페에 어떻게 가입할지, 누구를 최애로 정할지 고민하다 잠들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보던 엄마는 JYP와 YG를 좋아했고 최근까지만 해도 최애는 크러쉬라고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느 날부턴가 회사에서 안좋은 일이 있으면 트로트를 듣고 아침에 기분 전환을 위해 트로트를 듣는 엄마로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곤 했다.


내가 난생 처음 가본 트로트 공연장은 사실 엄마에게도 첫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이토록 아이처럼 흥분한 엄마의 모습을 본 것도 나에게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굿즈가 비쌀 것 같다면서도 "00 부채요"라고 수줍게 주문하는 모습을 보니 돈 버는 딸로써 카드를 안 꺼낼 수가 없었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도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수줍음 많은 엄마가 처음 보는 할머니들과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노래를 듣고, 누가 얼마나 귀여운 짓을 많이 하는지 수다 떠는 모습을 보니 엄마에게도 덕질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우리 엄마도 만나는 사람들한테 "누구 제일 좋아하시냐"고 묻는 아줌마팬이 맞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건 그런 건가보다. 잠시 현실을 잊고 한 사람에게만 몰두하는 것, 같은 공감대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하나 되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엄마가 '15만 원짜리 티켓이 150만 원보다 값지다' 라고 표현한 이유라 생각한다. 그런 엄마들이 모인 콘서트장을 둘러보니 결국 모두 소녀였다는 걸,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운 수줍은 여자들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겨우 가사 한 마디로 엄마들을 울리고 웃기는 트로트는 그런 힘을 가진 장르였다.



너도 나도 트로트? 어쩌면 당연할 수도.

내가 이번 트로트 경연을 유심히 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뮤지컬과 클래식 공연장에서 보았던 꽤 유명한 인물들의 도전이 너무나도 의아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임영웅 신드롬을 지난 이후로는 트로트 업계가 내리 하락세라는 말도 있는데 굳이 이런 장르에 왜 도전한다는 거지? 게다가 각자 분야에서 독보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 무슨 미련이 있다고 트로트에, 그것도 경연에 참가한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챙겨보기 시작했는데 결국엔 트로트에 관심이 생긴 계기가 되기도 한 듯하다. 나는 그들의 도전이 좋았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이 비판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장르에 뛰어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지막 방송을 보면서도 '도대체 왜 트로트야?'라는 의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는데, 알고보니 그 답은 현장에 있었다. "부모님이 좋아해서 시작했다"는 인터뷰가 꽤 진부하게 느껴졌는데 어쩌면 그 말이 진실이고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트로트 콘서트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정(情)이 이제껏 받았던 사랑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부모와 자식이 손 잡고 와서 같이 따라 부를 수 있는 현장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 소중하게만 느껴질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끌리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쩌면 그 선택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원래의 길을 잠시 뒤로 하고 이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어질 만큼.



누가 물었다. "락이 트로트보다 위에요?" "트로트는 마이너에요?"

나는 그런 줄 알았다. 세상 음악 아니, 예술에 위아래가 어딨겠냐만은 그래도 그런 줄 알았다. 물론 트로트가 마이너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즐겨 듣는 힙합이나 R&B가 조금 더 고급진 음악이라는 편협한 생각에 갇혀 있었다. 애초에 귀 기울여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왠지 트로트를 듣는 게 조금은 창피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세련된 도시 여자'로 보면 좋겠다 생각하다보니 왠지 트로트라는 한 단어가 그 모든 이미지를 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트로트의 맛을 아직 몰라 하는 이야기'라며 정신 승리에 이르기로 했다. 모두가 사랑에 빠진 그 현장을 경험한 이상 이제 이 장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음악,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나도 처음에는 영어가 난무하는 가사가 신물나 트로트를 찾아 들었고, 듣다보니 이 장르의 역사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트로트에는 인생이 있다'는 골수 팬들의 말을 맹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스물 아홉, 입덕 부정기를 지난 요즘, 꽤 오랫동안 애매한 길을 걷던 내 삶에 간만에 '애매하지 않은 확실한' 취향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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