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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매 Jul 11. 2023

EP 03. 트로트 덕후 모녀의 유튜브 촬영

인생 첫 출연 섭외


 여느 때와 같이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 후, 동료들과 한 잔 기울이고 있던 밤. 모르는 계정으로부터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엄마와 함께 '트로트 덕질하는 모녀'로 유튜브 콘텐츠 촬영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사칭 계정인가 싶어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실존하는 정직한 계정이었다. '아직 사람들은 내가 트로트 좋아하는 걸 모르는데...' 싶은 마음이 앞서 잠시 고민했지만 "너무 재밌겠다!"며 기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살짝 마음이 움직였다. 다른 건 걱정하지 않고 오직 엄마와의 추억을 쌓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으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아 일단 '출연할게요' 라는 답장을 보냈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느 날 받게 된 의문의 DM


 촬영까지 주어진 시간은 약 열흘. 우리는 각자 최애 가수와 무대 영상을 정해 PD님께 전달했고 팬덤 컬러에 맞는 의상을 구하기 위해 애쓰며 시간을 보냈다. (결국 퍼스널컬러 쿨톤에 속하는 나는 형광 주황색을 소화하지 못해 평소에 입던 무난한 옷을 입기로 했지만) 촬영 당일 어떤 질문을 받을지 몰라 평소보다 더 열심히 덕질 공부를 하기도 했다. 수능 공부보다도 열심이었던 우리에게 그 모든 과정들이 낯설고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한 설문조사를 보니 여행 과정에서 가장 설레고 즐거운 순간이 '공항가는 길'이라고 하던데, 이 또한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촬영 직전까지도 내 머릿속은 '내가 트로트 덕후로 출연하다니. 스스로 도망칠 수 없게 트로트 덕후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다니. 그것도 엄마랑 같이. 아이고 내 팔자야.' 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내심 기대되고 들뜨는 마음이 앞서는 날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출연 소식을 접한 많은 지인들이 "너 그정도로 트로트 좋아했어?"라는 공통 질문을 쏟아내니 조금 민망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이 경험이야말로 나의 취향을 온세상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20대 트로트 덕후여, 앞으로 나아가자는 나만의 구호를 외치며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제 도망칠 수 없어.


 촬영 이후 2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해외워크샵과 프로젝트 마감을 앞두고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언제 영상이 공개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약속했던 영상 업로드일이 다가왔다. 엄마는 아침부터 '드디어 오늘이 그 날이냐'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나는 그제서야 현실을 실감하며 체념하기 시작했다.


 업로드 예고와 동시에 보게 된 충격적인 썸네일. 누가 봐도 트로트에 인생을 건 모녀처럼 보이는 모습과 강렬한 컬러에 웃음부터 나왔다. 이정도면 애매한 삶에서 벗어나 내 취향을 온 세상에 알리는 '김확실'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와 엄마가 이렇게까지 트로트 콘서트에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영상을 보며 깨달았다. 말하는 내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모습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자니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 영상은 오늘을 기준으로 약 1.4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댓글창은 곧 엄마아들(민수현님)과 일등사위(손태진님)의 팬들이 모여 "내 가수가 최고!"라고 외치는 응원의 장이 되었다.



우리를 뭉치게 만드는 힘.


 촬영 과정에서도 계속 이야기했던 것처럼 엄마와 함께 하는 덕질은 우리 모녀 사이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트로트 팬들과 소통하며 응원하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동영상이 업로드된 지 약 한 달이 지난 요즘에는 퇴근길에 트로트 리스트를 열어 보다가 종종 생각나면 댓글창을 열어보곤 한다. 여전히 모두가 아들로, 사위로 삼으며 '왕자님' 또는 '귀공자'라고 부르는 분위기가 익숙치 않지만 적응 중인 듯하다. 그 흔한 '오빠'라는 단어를 찾아 보기가 참 어려운 MZ 트로트판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덕질은 공통적인 관심사와 취향을 가진 이들이 하나로 뭉치게 하는 놀라운 마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나 트로트 덕질은 이미 각자의 생활에 익숙해진 가족들이 잠깐이라도 한 자리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함께 보내도록 해주는 점, 그리고 온 세대가 모여 한 목소리로 노래하게 해준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이번 유튜브 촬영은 그런 의미에서 '삼삼오오 뭉치는 일'이 얼마나 멋지고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었고 앞으로 트로트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더불어 나의 '트밍아웃'도 도와준 가치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앞으로 트로트로 인해 얼마나 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지 기대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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