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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테라의 "정체성"을 읽고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타인을 얼마나 알 수 있고, 나에 대해 얼마만큼 보여주고 살고 있을까? 이 소설을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르망디 해변에서 하룻밤을 보낸 샹탈과 다음 날 합류한 장마르크는 권태기에 접어든 동거 남녀다. 장마르크는 해변의 늙은 여자와 샹탈을 헷갈려 하고, 샹탈은 해변의 남자들을 유혹하는 상상을 해 보지만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늘 곁에 있으므로 당연하게 여기고, 주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친한 친구였던 F는 장마르크를 배신했고, 눈꺼풀이 깜박이는 여성에 혐오감을 가졌던 장마르크를 기억하지만, 장마르크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병들어 누워 있는 F는 예전에 장마르크가 생각한 모습과 많이 다름을 인식한다. F와의 관계에서 보듯 누군가의 정체성이 이렇다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상대방이 인식한 것과 다르게 행동하면 배신감을 느낀다, 장마르크가 F에게 그랬듯이.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라는 고백에 질투를 느낀 장마르크는 샹탈에게 편지를 보낸다. 낯선 모습의 샹턀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샹탈은 누군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고 느끼며, 편지를 장롱 속 브래지어 밑에 보관한다. 두 번째 편지는 경찰조서처럼 세세하게 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뒤바로라고 생각한 샹탈은 빨간 자주 목걸이를 걸게 된다. 뒤바로는 두 사람을 지나쳐 갔고 샹탈의 얼굴이 붉어졌다. 샹탈은 거지가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해서 200프랑을 주지만, 거지에게서 공모의 눈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한다.

  샹탈은 왜 편지를 브래지어 밑에 보관했을까? 불륜을 전제한 이런 행동은 장마르크가 사랑하는 샹탈이 아니다. 하나의 환상이다. 그동안 장마르크가 믿었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권태기에 이른 남녀라면 뭔가 자극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 자극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편지다. 편지는 두 사람을 권태에서 벗어나 긴장하게 만든다. 샹탈은 미지의 남성을 상상하며 긴장하고, 장마르크는 그런 샹탈의 모습에 질투하며 긴장한다.

  옷장 속의 숄이 다르게 개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샹탈은 장마르크가 자신을 염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샹탈은 필적 감정사를 찾아가고 거기서 장마르크의 필체임을 알고 분노한다. 장마르크는 두 번째 편지에서 시라노의 가면을 쓰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의 질투심은 서서히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환영으로 변형해 버렸다.

  시누이가, 샹탈이 전 남편에게 “내 작은 생쥐”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시누이는 샹탈을 좋게 얘기하는데 샹탈은 평소에 시누이를 적대적으로 얘기했음을 떠올리며 샹탈의 두 얼굴에 대해 생각하고 부역자에 빗댄다.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런 열악하고 딱딱한 환경도 버텨냈을 거라 생각하니 도저히 샹탈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일면 샹탈은 아들을 잃은 것이 자신이 자유를 찾는 계기가 됐음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조카들이 장롱의 속옷과 편지를 어질러 놓은 것에 분노해 샹탈은 다 나가 달라고 종용한다. 샹탈은 런던으로 먼저 떠나고 장마르크는 그녀를 따라간다. 난교를 상상하는 샹탈에게 금발의 여인, 흑인 여자, 이빨을 드러낸 개, 70대쯤 되는 남자와 차례로 부딪힌다. 알몸의 샹탈이 의자에 앉아 있고 70대 노인은 “안, 당신 아기는 잊어요. 죽은 자들은 잊어버리고 삶에 대해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샹탈을 부르며 장마르크는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안고 잠을 깨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샹탈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는다.

  이 소설은 표현이 매력적이다. 묘사가 세밀하고, 성적인 묘사도 거침없이 한다. 행동을 통해서 심리를 잘 표현한다.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반복적이며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비밀이다.”와 같은 참신한 사유도 많다. 깊이 곱씹어야 비로소 이해되는 부분이 많은 것은 몽환적이고 상징적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읽어볼수록 매력이 배가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해 본다.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 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 삶이 이런 뻔뻔한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이 부분부터 소설이 갑자기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시점이 변한다. 앞의 이야기를 갑자기 뒤엎는 진술과 주체적 인물을 가정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분히 몽환적으로 전개되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흔들어놓은 것이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헷갈리게 만들어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혼란스럽지만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장마르크가 샹탈에게 입술을 대려고 하자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라고 한다. 또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라고 덧붙인다.

  샹탈의 이 말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 같다. 21장에서 눈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보는 것과 정체성과의 연관성을 미리 알려주기 위한 것 같다. 눈이 다른 곳을 볼 때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뺏긴다. 그만큼 보는 것은 사랑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 샹탈은 누가 자신을 봐주는 데 신경을 썼지만, 혼란기를 겪고 난 후에는 자신이 보기만 할 거라고 말한다.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겠다는 건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말일 것이다. 누군가를 볼 때 편견을 갖지 말고, 샹탈이 스탠드를 켜놓고 보듯 자세히 보면 어떨까. 그러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밀란 쿤테라 #정체성 # 독후감 #정정화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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