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먹으라고요?

명절에 맛본 최악의 음식

by 이민정


나는 한식파에 짠 돼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또 맛있게 먹지만 그래도 늘 생각나는 맛은 우리 한국 음식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 같은 한국의 장맛을 매일 먹으면서도 늘 그리워한다. 청국장 냄새를 맡으면 설레고, 김치를 먹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사람이 바로 나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고, 대접할 일이 생기면 한정식집을 찾고, 친구들을 만나 가볍게 밥을 먹을 때도 한식 위주로 메뉴를 고르곤 한다. 호기심이 많아 다른 나라 음식들도 곧잘 먹긴 하지만, 그렇게 먹고 나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배는 부른데 마무리가 안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식사 후, 자리를 옮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도 내 마음속 어딘 가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느껴진다. 이런 때의 다음 끼니는 무조건 한식이다. 밥에 찌개, 그리고 반찬… 먹고 나면 단전에서부터 꽤나 풍성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던 나를 보며 엄마도, 친구들도 할매 입맛이라며 놀렸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입맛을 설명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언젠가 TV프로그램에서 만난 단어인데, 꽤나 인상 깊게 남은 말이다. 짠 음식을 더 선호하고 많이 먹는 사람은 짠 돼지, 단음식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단돼지라 구분한다는 것이다. 식성을 이렇게 단순하게 나누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만, 굳이 이 중에서 끼워 넣는다면 나는 짭짤한 음식을 더 좋아하는 짠 돼지다. 예를 들면 나는 달콤하게 양념한 불고기보단 소금, 후추로만 간을 해서 구운 삼겹살을 더 좋아하는 부류에 속한다. 인공적인 단 음식은 그다지 즐기지 않아서 파이, 케이크, 도넛 같은 디저트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나이기에 명절은 맛있는 한식을 내내 먹을 수 있는 행복한 기간이다. 그래서 도무지 최악의 음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다 맛있었다. 설에는 할머니와 함께 빚은 만두를 먹을 수가 있고, 추석엔 깨가 든 송편을 먹을 수 있다. 삼삼한 나물반찬과 짭조름한 갈비찜은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한다. 윤기 있는 쌀밥에 술술 넘어가는 고깃국. 나의 최애 메뉴 잡채와 전은 하루 종일도 집어먹을 수 있다. 너무 많이 먹어서 조금 느끼해진다 싶을 땐, 시원한 나박김치 한 술 뜨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이렇게 나는 맛있는 음식 때문에 명절을 기다리는 그런 어린이였다.

어느 추석날이었다.
친척들과 재밌게 놀고, 맛난 음식들을 먹으면서 행복해했던 명절의 어느 날이 한순간에 최악으로 바뀌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어른들을 따라 선산으로 성묘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내려오면 보통 할머니 댁으로 바로 가는데, 그날은 큰 할아버지 댁 막내삼촌의 사슴농장으로 향했다. 우리 어린이들은 영문을 모른 체 따라갈 수밖에. 어린 나는 사슴 먹이 줄 생각에 또 금방 신이 나 룰루랄라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해서 사슴들 보면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어른들이 웅성웅성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사슴들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사슴이 울면 굉장히 공포스러워지는데, 그 소리가 굉장히 크고 괴물이 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사슴 울음소리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그 소리에 경악할지도 모른다. 사슴이 갑자기 왜 저리 소리를 낼까? 놀라 두리번거리다 이내 그 이유를 알았다. 어른들이 녹용채취를 위해 사슴뿔을 자르려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사슴 한 마리가 겁이 났는지 울기 시작했고 다른 사슴들도 떼 지어 울어댔다. 어린 나는 뿔을 자르려니 아파서 우는 거라 생각하고 나도 사슴처럼 무서워져 소리 지르고 울고 싶었다.

지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슴뿔은 보통 1년에 한 번씩, 가을이 되기 전에 잘라주어야 한다고 한다. 가을철이면 번식기라 수컷들이 예민해지는데 그럼 뿔로 서로를 들이받고 싸울 때가 많다. 뿔을 잘라서 싸워도 다치거나 죽는 것을 예방하려는 목적도 있고, 녹용을 채취하는 시기로 그즈음이 적절하기 때문이기도 하단다. 시기를 놓치면 상품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건 사슴이 뿔을 자르는 것은 사람이 손톱을 깎는 것과 같이 고통이 없다는 사실.
하지만 이는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고, 그 당시에는 사슴은 울부짖고 어른들은 뿔을 자르겠다고 모여 있으니 어린 나의 시선으로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웠던 순간이었겠는가.

그리고 더 최악인 건 지금부터였다. 뿔을 자를 때 나오는 사슴피(녹혈)가 어린이들 성장에 좋다고 어린이들이 이걸 마셔야 한다며 소주잔에다 조금씩 따라 주시는 게 아닌가.
사촌 큰 오빠부터 차례대로 녹혈이 담긴 소주잔을 받는 순서였다. 큰 오빠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받아 마셨다. 조금 있으면 내 차례인데…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고, 아빠도 삼촌들도, 다 무섭고 내가 모르는 야만인 같고, 정말이지 너무너무 이상하기만 했다. 어른들의 성화에 나는 손을 덜덜 떨며 소주잔을 입에 댔고, 어쩔 수 없이 한 모금을 입으로 넣었지만 도저히 삼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못 삼키겠다고 울다가 그만 꼴깍 삼켜버렸다. 그리곤 놀라고 억울해서 정말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한 차례 소란이 있고 난 뒤 어른들도 나 때문에 진땀을 빼서인지 동생들에게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 해의 사건 이후로 아이들에겐 녹혈을 마시라고 권하지 않으셨고, 어른들도 그 현장에서는 드시지 않기로 하셨다.

그 해 추석은 소주잔에 담긴 녹혈의 빛깔처럼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고, 내 입 속에 들어온 것들을 음식이라 부른다면 그때의 녹혈 한 모금이 내 인생 가장 무서웠고, 가장 나쁜 기억으로 남는 음식일 것이다.
글을 쓰면서도 자꾸 멈칫거린다. 그날이 떠올라서…


#글쓰기훈련중

#내가먹어본최악의명절음식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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