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그 녀석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말도 아직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 녀석.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먹고 싸고, 울고, 웃는 것이 다였지만 세상 무엇보다 강한 존재감을 가진 녀석.
그 녀석은 제법 빠르게 성장이란 걸 해 나갔다. 이제는 동그란 얼굴에 포동포동한 팔다리를 가지고 재밌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나와 같은 몸의 구성이지만 관절과 근육을 쓰는 방법을 익히고 있는 중이니 몸을 쓰는 방식에 서툴었겠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힘들 법도 한데 참 열심히,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집안 곳곳을 누빈다. 발끝 닿는 모든 곳이 자신이 개척한 영토인양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만의 표식을 남긴다. 집의 모든 곳은 금세 녀석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내가 소유한 많은 것들에 종말이 왔다. 네 것 내 것이 없어지자 그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원래 내 것이었던 많은 물건들에 강한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녀석이 가장 먼저 궁금해했던 건 바로 옷이었다. 엄마의 뱃속에 있던 시절부터 후각은 발달한다고 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아빠의 옷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엄마인 나의 옷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어 그 옷을 가진다. 가지고 돌아다닌다. 마음껏 두르고 누리다 다른 관심사가 생기면 그제야 내려놓는다. 베란다에 놓인 화분도 신기하고, 선반에 놓인 물건들도 하나같이 다 새로운 세상이다. 선반의 가장 아래부터 찬찬히 탐색을 시작한다. 손에 닿고, 발길이 닿는 곳의 모든 것에 흥미를 보였다. 다용도실의 건조기도 신기했던 걸까? 여긴 왜 들어가 앉아있는 건지! (과거 우리 집 다용도실엔 건조기를 세탁기 위에 놓고 사용하지 못해 바닥에 내려놓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녀석의 하루하루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제 녀석은 새로운 곳을 개척하려 한다. 이번엔 조금 높은 바라본다. 작은 방에 있는 책상 위를 노리고 있다. 저곳에 어찌 올라갈지 고심하는 눈치다. 역시나 그 길을 선택할 줄 알았다. 책상 앞에 놓인, 책상보다는 조금 낮은 높이의 시디즈 회전의자가 답이었다. 의자를 공략해 밟고 올라가 책상 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이었겠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은지 자꾸 멈칫멈칫하는 모습을 보인다. 잡고 올라가려고 하면 의자가 빙글 돌아가 녀석이 의지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제법 당황한 채로 작전상 후퇴를 선택한다. 안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누이며 휴식을 취한다. 우유도 쭉쭉 먹는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는 방안을 한 번 쓱 훑어본다. 새로운 목표물을 찾는 과정은 순식간이다. 이번 타깃은 화장대였다. 제법 큰 거울이 있는 화장대여서 늘 신기해하며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곳이었을 거다. 이제 자신의 몸이 이곳을 탐험하기에 적합하다 여겼는지 그대로 돌진해 간다. 내가 본 것은 여기 까지다.
나는 엄마이기에 이유식을 만들어야 했고, 청소도 해야 했고, 그 녀석보다 먼저 태어난 생명체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 녀석만을 바라보고 있을 순 없었다. 내가 엄마의 일을 하는 동안 온전한 자유를 느끼며 화장대가 있는 공간을 점령했겠구나 생각만 했다. 화장대를 살펴보거나 뭐가 없어진 건지 체크하지 않았다. 녀석이 나의 공간에 들어오는 일은 이제 일상 다반사니까. 그리고 평소 그리 화장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 화장대는 비교적 썰렁하다. 기본적인 스킨로션과 비비 크림, 립스틱, 헤어 에센스, 면봉, 티슈정도가 올려져 있다. 그 흔한 보석함도 따로 없고, 알록달록한 섀도나 브러시 같은 화장도구들도 거의 없다. 세상 재미없는 화장대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나였기에 더 무심했던 것이다.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는 뭔가 일이 생겼음을 알아챘다. 외출을 해야 해서 화장을 좀 해야 했기에 화장대 앞에 앉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화장대 앞에서 너무 황당해졌다. 립스틱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립스틱이 보이질 않았다.
그랬다. 녀석이 이곳을 점령하고 난 후, 전리품으로 립스틱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 립스틱을 어디에 감춰두었던 것인지는 영영 알 수는 없었지만 립스틱은 이내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아래 널어 둔 이불에 현란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기저귀 함에 담아둔 기저귀에 하나하나 표시된 체크로, 또 택배 상자에 남겨진 알 수 없는 표식으로… 녀석은 내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틈을 타 나의 립스틱을 사정없이 발라버렸다. 그것도 아주 여러 곳에 말이다. 내가 딱 2번 내 입술에 발라본 디올 립스틱이 녀석의 손에서 그렇게 크레용처럼 닳아 없어졌다. 그래… 립스틱이 크레욜라 크레용보다 발림성이 부드럽고 좋았겠지. 역시 좋은 걸 알아보는 눈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너그러웠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 솔직하게 내 감정을 드러내 버렸다. 아이가 자라 종종 그때 이야기를 한다. 엄마 립스틱 가져가서 장난친 거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받는데 불쑥 머쓱함이 올라와 얼굴을 돌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