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스트] 에세이형 독후감

기록하지 않으면 당신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것이 된다.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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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는 특이한 구조의 소설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네 개의 다른 목소리로 반복해서 들려준다. 소설 속 소설인 「채권」, 실제 인물의 자서전 「나의 인생」, 고용된 작가의 회고록 「파르텐자」, 그리고 마지막 「선물」은 밀드레드의 일기장이다. 이 네 편의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금융계의 거물 앤드루 베벨과 그의 아내 밀드레드다. 단, 이름은 각 이야기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네 개의 전혀 다른 시선이 제각각 증언하는 방식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읽는 내내 드는 질문은 하나다.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첫 번째 이야기 「채권」에서 밀드레드는 헬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총명하지만 정신병을 앓다가 결국 죽고 마는 여인. 읽으면서 나는 자꾸 불편해졌다. 베벨(소설 속에서는 다른 이름)이 헬렌의 병을 치료하는 방식조차 사업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부와 공헌의 이미지를 쌓는 데 아내의 고통마저 활용하는 인물. 소설만 읽었다면 나는 베벨을 그런 사람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두 번째 「나의 인생」은 베벨이 직접 쓴 자서전이다. 여기서 밀드레드는 남편의 성공을 조용히 뒷받침한 헌신적인 동반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 밀드레드의 일기장에서 그 같은 남편은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밀드레드의 눈에 베벨은 자신이 제안하는 아이디어를 자기 것인 양 가져다 쓰는 사람이었고, 아내가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더 노골적이다. 베벨은 파르텐자라는 작가를 고용하여 밀드레드의 자서전을 쓰게 한다. 돈으로 맺어진 계약 관계. 파르텐자가 느끼기에 베벨이 원한 건 밀드레드의 진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된 밀드레드였다. 금전적 관계 안에서 쓰인 자서전은 결국 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돈을 댄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네 편 중 마지막 「선물」은 밀드레드의 일기장이다. 이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기에도 과장이나 자기합리화가 섞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마저 밀드레드 자신의 것이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가공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가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쓴 목소리다.

밀드레드가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이 소설에서 영원히 헬렌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총명했지만 정신을 잃고 쓸쓸히 사라진 여자. 혹은 베벨의 자서전 속 조연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남편의 성공 곁에서 조용히 빛을 발한, 이름 좋은 내조자로. 그녀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어디서 좌절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일기장이 있었기에 밀드레드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작가 헤르난 디아스가 마지막 장의 제목을 「선물」이라고 붙인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자기 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선물이라는 의미로 나는 읽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빼앗긴다

독서모임에서 참여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일기도 자신이 꾸며 쓰면 사실이 아닐 수 있지 않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꾸민 이야기도, 남이 꾸민 이야기보다는 낫다. 아무리 부풀리고 미화해도, 그 굴곡은 내 감정의 굴곡이고 그 선택은 내 기억의 선택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된 이야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내 인생이 베벨처럼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가 굳이 왜곡하거나 다시 쓰고 싶어 할 만큼 극적인 삶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지 남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인생을 위대하다고 쓰면 위대해지고, 평범하다고 쓰면 평범해진다. 어느 쪽이든 그 판단은 내 것이어야 한다.

기록하지 않고 죽는다면 내가 평생 품고 살았던 생각들, 이불 속에서 조용히 울었던 감정들은 내 몸과 함께 사라진다. 사진은 남길 수 있겠다. 하지만 사진 속에는 내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쓰여 있지 않다. 사람들이 그 사진을 보며 상상할 뿐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전하는 것은 결국 내가 직접 쓴 글이다.

『트러스트』는 자본주의시대 사업가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기록의 권력에 관한 이야기다.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같은 삶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권력을 타인에게 넘겨줄 때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잃는다는 것. 작가는 그것을 밀드레드의 일기장을 통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기록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늘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에 화가 났는지, 무엇을 원했는지,그것을 내 손으로 쓰는 일. 그것이 쌓여 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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