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세상을 만든다

토인비의 문장에서 시작된 나의 질문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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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역사의 발전은 인류의 정신이 성숙하고 고귀해지는 데 있다."

『처음 읽는 현대 철학』이란 책을 읽다가 이 문장 앞에서 손이 멈췄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남긴 말이라고 했다. 짧은 문장인데, 한참을 거기 머물렀다. 역사의 발전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늘 경제성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GDP, 기술 혁신, 생활 수준의 향상. 그게 발전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어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그 변화는 정말 눈부시다. 밤을 밝히는 전등 하나 없던 시절에서 이제는 손바닥 위에서 지구 반대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는 머릿속에 지식을 꾹꾹 눌러 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나무판자를 걸쳐놓은 재래식 화장실을 쓰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의 수세식 변기는 그야말로 신세계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상은 이렇게 편해졌는데 사람들은 왜 점점 더 힘들다고 할까.

얼마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장애인 민원인이었다. 그는 중고 전기차를 사면서 차량 취득세 감면 혜택을 받았다. 환경을 생각해 고른 차였다. 그런데 충전소 충전기와 호환이 되지 않아 처음부터 쓸 수가 없었다. AS 센터에 연락해도 "기다려 보라"는 말만 돌아왔다. 결국 다시 중고차를 살 수밖에 없었는데, 기존 전기차를 60일 안에 팔아야 한다는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 새로 산 차의 감면분을 추징당했다. 자동차세도 따로 내야 했다.

억울한 마음에 우리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지만, 직원들은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규정만 이야기하다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우리 사무실 전화는 20분이 지나면 자동으로 끊기게 되어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다녔다고 했다. 개근을 하겠다고 아픈데도 학교를 간날 이유도없이 뭉뚱이 찜질을 당했다고 했다. 퇴직 후에는 전 재산을 교회에 기부했다. 지금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면서 받는 돈도 기부하며 살고 있다. 노숙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에 가서도 봉사하며 산다고 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나라가 자신에게 해준 게 뭐냐고 물었다. 하라는 대로 살았는데 돌아오는 건 세금 고지서뿐이라고.

그 말을 듣는 데 마음 한쪽이 쿵 했다. 억울하겠다 싶었다.


우리 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은행 적금을 해를 넘기기 전에 잘못 해약하는 바람에 오빠 건강보험 피부양자에서 빠지게 됐다. 해만 넘겼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그 이후로 매달 날아오는 건강보험료 고지서를 보며 엄마는 말했다. 뼈 빠지게 모은 돈을 뺏어다가 수급자 먹여 살린다고.

듣고 있으면 전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오는 게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는 요구라면, 누구라도 억울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통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다. 우리는 다들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내게 이익이 되면 당연하게 여기고, 불이익이 돌아오면 불만이 쌓이는 것.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생각만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토인비는 역사가 발전하려면 인류의 정신이 성숙하고 고귀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다시 들렸다. 경제가 성장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뉴스에는 더 잔인한 범죄가 늘고,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데, 마음은 왜 이렇게 허한 걸까.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자리를 맴돌거나 어쩌면 조용히 뒷걸음질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근사해 보이려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냥 내가 하는 생각들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내가 느끼는 불만이나 억울함이 나를 좋은 방향으로 데려가고 있는지, 아니면 제자리에 묶어두고 있는지를. 그리고 가끔은 조금 다르게 생각할 방법은 없는지를.

나 혼자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냐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먼저 해야 남도 하지 않겠나 싶다. 토인비의 그 문장이 내게 준 숙제는 아마 이것인 것 같다. 더 나은 세상은 더 나은 생각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다듬는 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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