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렌인지가 가르쳐준 삶의 법칙

힘든 일일수록 오래 남는 이유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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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다.

세상에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꽃은 피었다가 시들고, 낙엽은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 다시 뿌리를 키운다.

움직이지 않는 듯 보여도 세상은 늘 변한다.

죽으면 변하지 않을까?

그렇지도 않다. 죽음도 또 다른 변화를 향한 시작일지 모른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플라스틱이다.

썩지도 다른 물질로 바뀌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편리하지만 결국 골칫거리가 된다.

그래서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이 꼭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겉으로 멈춰 보이더라도 안에서는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감정을 느낀다.

그만큼 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이 녹슬고 멈추면 생각이 탁해진다.

아마 그래서 인간에게는 ‘배고픔’이란 본능을 준 게 아닐까 싶다.

배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게 만들고, 배가 차면 또 다른 이유를 찾아 움직이게 한다.


이번 추석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큰아이는 캐나다에서 유아교사로 일하고 있고 작은아이는 군대에 있다.

집에는 남편과 나만 남았다.

추석 전날 음식 준비를 마치고 나니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지만, 막상 손이 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거슬리던 게 가스레인지였다.

며칠 전부터 ‘이번엔 꼭 닦아야지’ 생각했는데, 연휴가 되어서야 결심이 섰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오래된 기름때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수세미로 문질러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베이킹파우더에 식초를 섞어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렀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이 일었다.

그릇에서 거품이 올라오는 걸 보니

새로운 세제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노란 기름때가 사라지지 않으면 손톱으로 긁어내기도 했다.

팔은 금세 뻐근해졌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깨끗하게 닦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삼발이와 불조절기 버튼까지 다 떼어냈다.

베이킹파우더와 식초를 섞은 물에 푹 담갔다.


사실 가스레인지는 늘 닦는 곳이다.

하지만 늘 ‘대충’이었다.

행주로 한 번 쓱 닦고 얼룩이 남으면 ‘다음에 하자’ 하며 넘겼다.

그렇게 미뤄둔 게 몇 년은 된 듯했다.

기름때는 사람 마음의 미루기 습관처럼 시간이 갈수록 진득하게 들러붙는다.

그걸 떼어내려면 결국 어느 날은 작정해야 한다.

두 시간이 지나자 허리도 아프고 어깨가 뻐근했다.

마지막으로 깨끗한 행주로 닦고 나니

가스레인지가 마치 새것처럼 반짝였다.

손끝으로 표면을 쓸어보았다. 매끈했다.

너무 세게 문질렀는지 불조절기의 인쇄 글자가 희미해졌다. 그마저도 흐뭇했다.



그날 저녁엔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혜리가 나오는 영화 ‘빅토리’였다.

주인공 필선은 거제도의 응원동아리 멤버로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백댄서 학원에 등록한다.

걸그룹 멤버가 될 기회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

화려한 무대 대신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길을 택한다.

명예나 인기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다.

영화는 교훈적이었다. 재미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주방으로 들어가자 가스레인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마음이 밝아졌다.

그저 청소를 했을 뿐인데, 묘한 성취감이 밀려왔다.

어깨에 남은 피로보다 마음에 남은 만족이 더 컸다.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또 무언가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눈앞에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즐거움은 잠깐이지만, 만족은 오래간다는 걸.

영화는 두 시간의 즐거움이었고, 가스레인지는 다음 날까지 내 마음을 환하게 했다.

힘든 일을 끝냈을 때 찾아오는 그 고요한 뿌듯함은

쉽게 얻은 즐거움보다 오래 머물렀다.

나는 오늘도 주방을 지나며 반짝이는 가스레인지를 본다.

그걸 볼 때마다 마음 한켠이 깨끗해진다.

청소는 단순히 때를 닦는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을 닦는 일이기도 하다.

분노, 후회, 게으름, 미루기 같은 감정들이 기름때처럼 쌓인다.

그걸 닦아내야 비로소 마음이 반짝인다.

닦지 않으면 결국 마음이 탁해지고 하루의 빛도 흐릿해진다.


이번 연휴는 쉬는 시간 같았지만

사실 나에게는 마음을 닦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인간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다.

움직여야 살고, 힘들어야 만족한다.

그게 어쩌면 삶이 주는 가장 솔직한 법칙일지 모른다.

힘든 일을 피하면 편하지만 만족은 없다.

조금 고단해도 스스로 움직여 얻은 결과는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일에서든, 관계에서든, 결국 오래 남는 건 힘들게 얻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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