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이 흐르는 자리

아들이 자라는 만큼 엄마가 늙어가고 나는 그 사이에 있다.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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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려는 순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대에서도 저녁이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훈련소 시절엔 주말에만 한 시간을 통화했는데, 자대에 배치된 뒤로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저녁에 연락이 온다.

“오, 아들. 밥 먹었어?”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한 시간을 넘겼다.

아들은 이번 주에 텐트를 치고 땅을 파고 창고 정리를 했다고 했다. 내무반 동기 중 몇 명은 선임들에게서 생활용품을 환영선물로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은 받지 못했단다. 선물은 받은 동기들이 물건을 사서 아들에게 건네주었다고 했다. 아들은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 친구가 “형진이 때문에 11월 말까지 써야 하는 민생지원금 다 썼다”라고 농담을 하자 미안함이 조금은 가벼워졌다고 했다.

아들의 순수한 마음과 동기들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차갑고 빡빡할 것 같은 전방 생활도 그들만의 온기로 버티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아들은 부대 안에 넓은 빨래터가 있고 책도 많다고 했다. 나는 “세탁기 돌리는 동안 책 읽으면 되겠다”라고 말했다. 책 한 권을 정해 빨래하는 날마다 조금씩 읽으라고 했다. 말하고 나니 또 아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한 셈이었다. 아들도 딸도 스스로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조언을 하고 있다.

아들과 통화를 마치니 저녁 8시였다. 엄마 집으로 향했다. 아들이 군대에 있고 딸도 캐나다에 있는 동안 나는 엄마를 돌볼 시간이 생겼다. 나라가 내 아이를 맡아준 덕에, 나는 다시 부모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엄마 집 앞에 택배 상자 여덟 개가 쌓여 있었다. 묵직한 상자들이었다. 문을 열자 엄마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는 쌀로 달라고 하지 말고 돈으로 달라고 해야겠어.”

그 말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안중에 있는 엄마 논에서 매년 보내오는 쌀이었다. 20kg 포대가 여덟 개.

엄마는 집 안으로 들여달라고 택배기사에게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할머니, 돈 줘도 못 합니다. 오늘 배송이 너무 많아요.”

엄마는 주머니 속 만 원짜리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흐렸다고 했다. 혼자 쌀 포대 앞에서 서성이다가 현관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이제는 쌀 한 포도 들기 힘든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엄마에게 더 서글펐을 것이다.

며칠 전 엄마가 “쌀 오면 어쩌지”라고 걱정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내가 와서 들여놓으면 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외투를 벗고 수레를 꺼냈다. 포대를 하나씩 옮겼다. 작은 방에 세 포대, 현관 안에 네 포대를 들여놓았다. 벗긴 포장지만 해도 한가득이었다. 분리수거장에 갖다 버리고 올라오니 엄마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제는 돈으로 받아야겠다.” 엄마의 표정은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래, 엄마. 이제는 두 포대만 받고 나머진 돈으로 받아. 엄마가 옮길 수도 없잖아”라고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엄마의 마음을 다 읽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걸렸다.

엄마에게 쌀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다. 자신의 땅에서 나온 햇곡식을 먹는 기쁨. 자식들에게 나눠주며 느끼는 뿌듯함. 여전히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자존감 같은 것 아닐까.

하지만 이제는 마음이 몸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 사실을 마주한 순간, 쌀 포대보다 마음이 먼저 무거워졌을 것이다.

오늘 내가 오지 않았다면 엄마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을 것이다. 쌀은 무겁지만, 엄마의 마음은 더 무거웠을 것이다.

나는 잠시라도 그 무게를 덜어주고 왔다. 그 생각에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따뜻했고, 엄마의 마음을 덜어주며 더 따뜻한 하루였다. 아들은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시기에 있고, 엄마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에 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누군가의 부모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자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대는 흘러가고, 돌봄은 방향을 바꾼다.

아들이 자라는 만큼 엄마는 늙어가고, 나는 그 사이에서 누군가를 돌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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