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속에서도 내 기준을 잃지 않기로 했다.
승진대상자 명단이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해 처음으로 내 이름도 그 명단에 올랐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명단에 올랐다는 건 승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진을 하지 못해도 매번 승진계획 공문이 오면 업무추진실적을 제출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젠가 올 일이 왔지만 막상 눈앞에 놓이니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 퇴직하는 과장님들이 일 년 공로연수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만큼 승진 자리가 더 생긴터라 승진자리가 늘었고 업무추진실적을 제출해야 하는 일이 일찍 왔을 뿐이다. 주변에서는 들러리 몇 번 서면 좋은 기회가 올꺼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온전히 나에게 와 닿지 않았다. 웬지 내가 그럴 자리에 서 있나를 돌아보게 된다.
김계장은 “세무직 5급 승진대상자가 7명이나 들어갔어도 들러리만 설 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이 먼저 승진시키면 뒤에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은 기회가 줄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승진은 늘 그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선배가 퇴직해야 후배가 승진할 자리가 열린다. 그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승진이라는 문제를 조직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모습도 보인다. 올해 8월, 우리 부서에 새로 여자 과장이 왔다. 12월이면 공로연수에 들어간다. 함께 근무한 시간은 고작 몇 달이다. 세무과 경험이 없는 과장님이 이 짧은 기간 동안 무엇을 지시하고 무엇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도 과장님에게도 이 기간은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과장은 직원들에게 “내가 있는 동안 알아서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지냈다. 깊이 관여해도 도움 되지 않는 자리임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았을 것이다.
우리 부서는 퇴직을 앞둔 과장님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사업부서가 아나라 구청장 보고도 거의 없다. 대부분의 일은 팀장과 직원 선에서 처리된다. 그래서 과장들조차 이곳을 ‘편한 자리’라고 말한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그나마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과장은 세무직은 승진이 늦다며 늘 안타까워한다. 여러가지 말은 오가지만 결국 제자리 걸음이었다. 6급 평주자 적체로 타 부서로 이동을 권했지만 그것조차 가겠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 또한 그랬다. 타 부서로 나가고 싶은 마음보다 익숙한 자리에 남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런 상태를 알기에 난 왜 세무직은 승진 대상자의 들러리만 세우냐는 말에 이유를 달기 싫다.
올해 처음 내 이름이 승진 대상자 명단에 올라갔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장이라는 자리에 내가 어울리는가?”
팀장은 되고 싶었다. 실무에서 벗어나 사람을 관리하고 팀을 이끌어가는 경험이 의미 있었다. 하지만 과장은 조금 다르다. 한 부서를 책임지는 자리다. 그만큼 무게도 크다. 아직도 나는 팀장으로서 내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지 고민이 많다. 이런 내가 과장이 된다면 더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되지 않을까.
과장은 나이나 경력만으로 되는 자리가 아니다. 책임의 크기만큼 마음도 따라가야 한다. 봉급이 오르고 위신이 생기니 승진을 해야하는 자리가 맞을까? 승진은 출세의 문제가 아니라 맡겨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하는 자리이다. 나는 그 무게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쉽게 욕심낼 수 없는 자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과장이 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쓴다고 할지도 모겠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일찍 공직에 들어왔다. 내가 과장이 되면 내 밑의 사람들이 승진할 기회가 늦어진다. 그 부분을 생각하면 조금 더 늦게 승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부서를 움직이는 힘은 팀장에게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럼 과장의 부담은 더 적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말이 옳은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지금 내 자리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의 방향을 잡고, 서로 힘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승진은 언젠가 오겠지만, 나는 일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 직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그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승진해야 한다고 믿는다. 현실은 늘 그렇지 않지만, 그 현실에 흔들려 내 마음까지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