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린 날, 마음의 방향을 생각했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마음이 성장하는 시간이다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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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자리에 앉자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첫눈이었다. 첫눈은 늘 설레는데 오늘은 그 설렘보다 묘한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과장님과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회식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과장님은 이번 달 19일까지만 나오고 공로연수에 들어간다고 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퇴직이라는 말이 눈처럼 조용하게 다가왔다.

횟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회를 뜨던 점원이 이층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니 전혀 다른 공간으로 들어선 듯했다. 복도를 지나며 ‘여기가 맞나’ 싶었다. 예약한 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마치 작은 미로 같았다. “세정과 예약입니다”라고 말하니 직원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과장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먼저 도착한 직원들은 과장님과 함께 앉아 있었다. 과장님은 올해 8월에 우리 부서로 오셨다. 우리도 어색하고 과장님도 어색한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떠날 시간을 맞았다. 공로연수라는 말이 주는 시간의 끝자락이 조용히 다가와 있었다.

테이블에는 두툼하게 썬 광어와 방어가 놓여 있었다. 오븐에서 구워 나온 생선에서 고소한 향이 났고 아귀찜도 작은 접시에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젓가락은 가장 먼저 고구마 튀김으로 향했다. 바삭하고 따뜻한 온기가 입안 가득 퍼지자 마음까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모듬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접시는 다시 채워졌고 매운탕이 나오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밥을 말아 먹었다.

나는 과장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과장님은 언제 들어오셨어요?”

“1991년에 들어왔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잠시 멈췄다.

나는 1995년에 들어왔다. 겨우 4년 차이였다. 나는 늘 과장님을 나보다 훨씬 앞선 사람, 어른스러운 사람, 경력이 넘치는 사람으로만 보았다. 그런데 숫자는 그 거리를 단번에 좁혀 놓았다. 그 사실이 낯설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벌써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선배였고, 어른이었다.

그때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묵직해졌다. 이제는 팀장 정도의 역할을 넘어서 한 부서를 이끄는 과장이라는 자리도 생각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퇴직이라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다가왔다. 70년생 언니들이 떠나는 날이 오면 나도 그 뒤를 따를지, 아니면 후배들과 함께 조금 더 머물지. 이런 생각이 조용히 마음속에서 오갔다.

세정과 과장님들이 퇴직하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그분들과 나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도, 경력도, 경험도 멀리 있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오늘은 그 간격이 생각보다 좁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일까. ‘어른’이라는 단어가 내게도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디서든 어른으로 보이는 나이가 되었고, 그 나이에 맞게 마음을 다지고 싶어졌다. 더 이상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나이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자리도 아니다.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식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펑펑 내리던 눈은 이미 멈춰 있었다. 눈발이 그친 거리 위로 빙판이 얇게 깔려 있었다. 가까운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눈길을 조심스레 지나가며 느리게 움직였다. 창밖에서는 자동차들이 방향을 잡지 못해 깜박이를 켜고 머뭇거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보며 내 마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을 생각할 만큼 남은 생이 짧아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젊은 마음으로만 살 수도 없는 나이. 나는 이제 어떤 방향을 잡고 가야 할까.

첫눈이 내린 밤, 질문 하나가 조용히 내 마음에 내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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