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세상 Sep 01. 2023

8월을 보내며

집에서 홀로 여름 나기

햇살이 쨍하고 때로는 무덥던 8월의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나의 8월은 온전히 나무와 숲과 숲의 온갖 생명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디 멀리 깊은 산이나 숲을 찾아간 것은 아니다.

나는 8월 한 달을 온전히 집과 근처 숲만 오가며 지냈다.

피터 볼레벤의 나무와 숲 이야기를 읽다가 눈이 피곤해지면 뒤뜰의 키 큰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지난겨울 눈폭풍에 나무 하나가 크게 상처를 입었다. 가지가 뜯겨 나가면서 몸통 아래쪽까지 죽 찢어졌다. 피터의 책에 의하면 저 정도의 상처는 치명적이다. 얼마나 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주변 동무들의 도움으로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란다. 경과를 보다가 그 녀석이 집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하겠지만.

뒤뜰에서 부는 바람이 시원한 날이면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고 바람맞이를 했다.

뒤뜰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가 종일 부산하다.

한 여름, 낮 기온이 31도가 넘었었는데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 덕일까,

저녁 무렵에는 열어놓은 창문 사이 들어오는 공기가 서늘하기까지 하다.

떡갈나무와 단풍나무 잎들이 서로 부딪쳐가며 바람에 길을 내준다.

자연 그대로를 주장했던 그이 덕에 우리 집 뒤뜰은 온갖 풀과 부러진 나뭇가지가 무성하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낙엽을 뚫고 새로 싹을 낸 크고 작은 들풀들이 서로를 기대며 거침없이 자란다.

청설모 형제가 나무 둥지를 오르내리며 서로를 좇는다.

붉은 배와 갈색 등을 가진 이름 모르는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와 땅에 떨어진 작은 떡갈나무 열매를 쪼다가 파다닥 날아오른다. 블루 제이와 레드 카나리도 청아한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이 녀석들은 너무 예민해서 사진 찍는 게 쉽지 않다.

거의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둔 우리 집 뒤뜰엔 먹이가 많아서 새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토끼 가족이 보금자리를 꾸린 적도 있고 너구리와 그라운드 혹도 가끔 보인다.

줄무늬가 예쁜 다람쥐와 지렁이와 개미들도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쁘다.


미물들 조차 사느라 바쁜데 나는 그저 앉아서 구경만 한다.

사는 것이 구경이 되어도 좋은가,

물어본다.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

그 긴 시간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막막할 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구경만 해도 돼.

그냥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앉아만 있어도 돼.

혹은

바람처럼 아무 데나 자유롭게 마음을 보내도 돼.

넌 자유야. 넌 자유야. 넌 자유야… 되뇐다.

 

그럴까.

주변의 모든 생명들이 부산한 삶을 사는 여름의 한가운데 이렇게 고요하고 정지된 듯한 시간을 자유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햇살이 쨍하고 뜨거운 날을 골라 빨래를 하고 마당에 매어 놓은 줄에 빨래를 널어 말린다.

작년, 여름이 다 갈 무렵 남편이 새로 매어준 빨랫줄이다. 그 사람 성격답게 꼼꼼하게 보조 받침을 끼워서 줄이 빨래 무게에 너무 늘어지지 않고 적당한 탄력을 주도록 매어졌다.

이 줄이 이젠 유품이 되었다.

줄 위에 블루제이가 앉아 나를 보고 있다.

항상 자유롭고 싶어했던 그의 영혼이 이제 저 새처럼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한국 뉴스를 듣다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지거나 분노가 솟으면 낫과 호미를 찾아들고 뜰로 나간다.

허리춤까지 웃자란 풀들을 향해 낫을 휘두르고, 뿌리를 통해 너무 무성하게 옆으로 번지는 미나리와 민트를 단호하게 솎아낸다.

아무리 자연주의를 표방해도 앞뜰과 드라이브 웨이 옆 긴 화단은 가끔 손을 대야 한다. 집이 폐가처럼 보이게 하지는 말아야 하니까.

세상을 어지럽히고 황폐하게 만드는 인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토끼풀이나 제비꽃, 엉겅퀴, 기타 풀들은 꽃이 질 때까지 그대로 둔다.

이 동네에서 살기 시작했던 20년 전에 비해 개체수가 확실히 줄어든 것 같은 나비와 벌들을 위해서 이다.


오후 4시쯤 되어 나무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기 시작하면 모자를 눌러쓰고 동네 숲으로 간다. 이 숲은 서울 면적의 반이 넘는 가티노 국립공원의 끝자락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슴무리를 심심찮게 볼 수 있고 가끔은 검은 곰도 눈에 띄어 곰조심 경고문이 입구에 붙어 있었다.

나도 산책길에 멀리서 한 녀석을 본 적이 있다.

올해는 그 경고문이 없어졌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숲 입구에 들어서면 서늘한 공기와 나무냄새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산책로 주변에 핀 들꽃들이 철 따라 바뀌며 마음을 즐겁게 한다.

바람에 혹은 곤충과 곰팡이류, 새들의 공격에 쓰러진 나무들이 숲 여기저기에서

땅의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부엽토로 일생을 마감하고 있다.

생명이 떠난 몸은 자신이 생명을 준 후손들의 자양분이 되어 그들 속에서 다시 살아간다.

사람도 결국 자연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생명의 순환과정 속에 들어있는 것을 알면서도 더 이상 곁에 있지 않은 사람을 애틋해하고 그리워하는 것 또한 남겨진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생명의 비밀이다.

몇 달 전 브라이스 캐년 여행 중에 도로에서 프레이리 독 무리 때문에 차를 멈춘 적이 있었다. 길 가운데에 여러 마리의 프레이리 독이 모여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보니 한 마리가 죽어 있고 나머지 아이들이 죽은 동무를 둘러싸고 어쩔 줄 몰라하며 모여 있는 것이었다. 죽은 녀석은 자동차에 치인 것이라고 짐작했다. 죽은 동무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프레이리 독 무리에게서 생명의 의미와 신비를 느꼈다.


생명을 담은 몸이 의식과 분리되는 순간 이미 그 몸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고 그 생명 자체는 남아있는 후손의 DNA 속에서 그리고 가까웠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다시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남겨진 자들이 생명을 담고 있던 몸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 생명을 그 답게 만든 것이 결국 그 몸과 함께 있을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이 깃든 그 몸’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죽은 자를 마음에 담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해 그 몸을 쉽게 놓아주지 못하는 것이리라.


숲 입구 가까이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왁자지껄 아이들의 얘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길 건너 본격적인 숲지대로 들어선다. 완만한 경사가 있고 약간 구불거리는 길을 5분쯤 걸으면 본격적인 숲길이 나온다. 눈이 무릎 높이로 쌓이는 겨울을 제외하곤 이 길은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항상 눈에 띈다. 그렇다고 사람들로 붐비는 일은 없다. 가끔 지나가는 자전거들이 좀 방해가 될 때가 있지만 대부분 한적하고 조용히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숲에서 들리는 자연의 소리들이 무심히 스쳐간다.

나는 그저 그 소리들에 귀를 열어준다. 음악을 들으려고 귀에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바람소리와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 다람쥐들이 풀 숲을 헤치는 소리, 딱따구리가 나무 등걸을 쪼는 소리, 이름 모를 새들이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소리…그 소리들 속에 나무뿌리가 가지들에게 팔을 이쪽으로 뻗으라고 보내는 신호소리도 있겠구나… 귀 기울여 본다.

가끔씩 전 날 보지 못했던 꽃이 새로 핀 것을 보면 멈춰서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는 건 브런치 때문에 새로 생긴 버릇이다.

피터의 책에서 본 검붉은 나뭇잎을 단 돌연변이 나무를 찾아보았다. 피터에 의하면 어떤 나무들은 붉은색을 반사할 수 있는 화학물질이 부족해 나뭇잎이 검붉게 보인다고 한다. 이런 나무들은 광합성 작용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해 결국 도태된다고 한다.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에 주택가에 인공적으로 심어진 경우를 빼고는.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동네에도 검붉은 잎을 단 나무들이 제법 있다. 나는 그의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 나무들도 그저 하나의 다른 품종이겠거니 생각했었다. 동네에는 제법 많은데 이 숲에서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으니 자연도태가 맞는가 싶다.

얼마 전 우리 집 앞뜰에서 검붉은 잎을 단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대로 크게 자라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위치가 아니지만 악조건을 무릅쓰고 생명을 키워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아직 뽑아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피터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별 망설임 없이 뽑아 버렸을 것이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한다니  살만큼 살다 자연도태 된다면 그것이 얘에게는 최선이리라 싶다.

이 숲에는 두 개의 작은 다리가 계곡 위로 놓여 있다. 두 번째 다리를 건너면 뒤돌아서 오던 길을 되짚어 온다.


숲에서 돌아오는 길 끝에는 언제나 슬픔이 기다린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항상 자기가 빚은 막걸리에 산소를 넣어주느라 막걸리통을 주걱으로 휘저으며 그가 앉아 있었다. 이제 거실의 그 소파가  비어 있다.

다시 슬픔으로 돌아오는 길이지만 다음 날이면 또 숲으로 향한다.

숲과 생명에 대한 책을 읽느라 집중하고 한 시간쯤 숲을 걷거나 뒤뜰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생명을 상실한 슬픔을 잊고 생명에 대한 경외로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8월을 보냈다.


8월이 지나면 이 숲과 뜰을 떠나 사람들 사이로 간다.

구순이 넘은 어머니와 몇 달 함께 지낼 계획이다. 나를 대신해 내 몫을 다해준 착한 동생들도 만나고

오랜만에 옛 벗들도 만날 것이다.

나는 참으로 어머니에게 인색한 딸이었다.

이제야 마음껏 누리게 된 자유로운 시간을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신 엄마를 위해  조금 내드리려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창문을 모두 닫는다.

밤공기가 진한 숲의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다.

창문을 닫기가 망설여지는 8월의 밤공기가 아름답다.

작가의 이전글 모든 삶은 흐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