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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Apr 25. 2023

낯선 익숙함

버나비 맥길 도서관 창가에서

    밴쿠버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버나비에 온 지 나흘째이다. 어제는 버나비 맥길도서관에 가 보았다. 캐나다 서부 도시 대부분이 그렇긴 하지만 버나비 역시 밴쿠버가 확장되면서 조성된 도시라 그런지 오래된 건물은 드물고 유리와 콘크리트로 조립해 쌓아 올린 고층건물이 많다. 단독주택들도 대부분 지은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고 현대적 디자인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집들이 많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부의 가띠노 시나 몬트리올, 오타와 시의 옛 도심들의 풍경과는 확연히 달랐다. 

     딸 내외가 이 지역에 침실 두 개짜리 가구 딸린 아파트를 무리해 가며 빌린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몇 달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게 된 내가 걱정되어 언제든지 저희들 사는 곳으로 오셔도 된다는 의미이다. 별로 말이 많지 않은 남편이었지만 나에게 만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평-조금 격을 갖춰 말한다면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비판을 자유롭게 쏟아냈던 사람이었다. 그 비판 혹은 불평에는 물론 나를 향한 것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뭔가를 쓸 때 특히 남편에 대한 얘기를 쓸 때는 자기 검열을 한다. (감히 불평이라니! 그의 익숙한 잔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38년을 함께했던 사람이 곁에 없고 혼자 밥 먹고 혼자 뉴스를 보고 영화도 혼자 보는 생활은 참 낯설다. 지금도 나는 그와 매일 함께 보았던 뉴스 채널은 보지 못한다. 한 번은 습관적으로 그 채널을 선택했다가 눈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황급히 텔레비전을 끄고 말았던 적이 있다. 그에 대한 얘기는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내 마음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맥길 도서관- 첫인상은 ‘흠 흠 그래 와~ 괜찮네’였다. 넓고 개방적이고 신축건물답게 깨끗하고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살 때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가던 목동 도서관도 좋았지만 이 도서관의 가장 큰 매력은 벽을 통유리로 설치하고 그 가장자리로 누구나 앉아서 책을 보거나 작업을 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는 점이다.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안락한 소파들도 놓여있다. 그 창 밖으로 트랙과 테니스 코트, 탁구 테이블, 수영장 등을 갖춘 아담한 공원이 훤하게 펼쳐진다.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주말이면 전주 시립도서관에 자주 갔다. 집에 식구가 많고 나만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곳의 서가들을 돌아다니며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어서 도서관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름 방학이나 겨울방학에는 아예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내가 책 읽기 외에 다른 취미생활은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할 의지도 의욕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내 딸이 도서관에 제일 먼저 데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직 서고의 책들이나 다른 자료들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버나비 도서관의 창가 테이블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텀블러도 들고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이민 간 첫 해에 몬트리올 퀘백대학에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교육과정을 등록하고 다녔는데 그곳에서는 컴퓨터 책상에 음료수 병을 꺼내 놓으면 안 되었다. 커피에 중학교 3학년 시절부터 중독되어 있는 나는 아침 커피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뜨거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나는 아침에 커피를 타서 홀짝홀짝, 뭔가를 하는 중간중간 긴장해소 차원으로 몇 시간에 걸쳐 마시는 습관이 있다. 제국주의 음료에 중독되어 우리 땅에서 한 톨도 나지 않는 커피를 마셔야 되느냐는 남편의 삼십여 년에 걸친(결혼 초 5-6년은 그런 비판을 안 했다.) 비판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산 나는 그 안내도 무시하고 커피가 든 텀블러를 컴퓨터 옆에 놓고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동료 학생 하나가 ‘넌 왜 텀블러를 컴퓨터 옆에 놓고 마시냐? 저 사인 안 보이냐?’하고 질책을 했다. (교수는 아무 말 안 하는데! 마실 때 외에는 뚜껑을 꼭 닫는데!...) 하여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지라 그 후 컴퓨터 방에 들어갈 때는 텀블러를 가방에 집어넣긴 했다. 그런데 버나비 도서관에서 본 풍경은 내가 커피를 들고 들어와도 아무도 야단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하거나 책을 보는 책상 위에 놓인 텀블러들을 보는 순간 나는 버나비 도서관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잔디밭과 꽃나무들을 보면서, 혹은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활기 찬 모습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고 뭔가를 끄적거리는 나의 모습-그것은 내겐 참 익숙하면서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모습이었다. 


    한가롭고 때로는 나태하고, 삶을 위한 노동과는 거리가 먼 그 생활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대학에 들어간 후 전태일을 알게 되면서, 야학을 통해 내 또래 젊은이들의 생활을 눈으로 보면서 나는 이념과 나의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으로 억눌러야 했다. 사십 대 중반, 부부 모두 천상 문과생으로 먹고 살 기술 하나 없이 이민 온 우리는 이 십 년 이민생활 동안 오직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올해 캐나다 공식 은퇴나이에서 한 해를 더 넘긴 나는 이제야 비로소 살아남기 위한 모든 노력과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더구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살게 된 나는 정말 모든 일상의 의무에서 거의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 계신 연로한 어머니와 독립해 살고 있는 자식들이 있지만 그저 애정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을 뿐 함께 살고 있지 않으니 나의 일상을 규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완전히 자유시간으로 이루어진 내 시간들을 채워 나가는 것도 온전히 나의 자유선택에 의해 이뤄진다. 그 선택이 나의 본성에 깊이 뿌리내린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싶다. 

    오랫동안 낯설어졌지만 아주 익숙한 내 모습이 유리창에 비치고 있다. 딸네 집에서 걸어서 37분 걸렸다. 왕복으로 치면 내가 평소 걷는 거리보다 약간 멀지만 늘 걷던 가티노 공원이 아닌 새로운 길, 또 도서관을 찾는 길이라는 즐거움 때문에 그런지 금방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비어 있는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마음이 푸근하다. 이민이라는 것을 올 때, 한국사회의 어려운 시간 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친구들, 가족들에게 뭔가 빚진 것 같은 미안함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공식 은퇴를 할 나이가 지났으니까. 그래서 조금은 외로웠지만 진짜 친구 몇 명은 있었고 학교공부 보다 내 좋아하는 책을 밤새 읽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쓰던 16살 청춘의 시작-그 오래전 나의 익숙하고도 낯선 모습으로 되돌아갈 자유와 시간이 허락된 것을 죄의식 없이 기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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