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아흔 두 번째 봄
어머니가 씨를 뿌렸다.
낮기온이 20도를 기록한 날
두 손으로 계단 손잡이를 잡고 혼자서는 몸뚱이를 버티지 못하는
흔들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
3층 계단을 내려가 밭으로 간다.
봄샘 바람에 혹시 기침병이 도질까
머리와 볼을 스카프로 싸매고
목에는 털목도리를 두르고
완전무장하고 밭으로 간다.
호미와 일장갑과 씨앗을 담은 소쿠리를 들고
내가 살살 뒤따라 밭으로 간다.
여름 내 국 끓여 먹을 아욱과 아들 딸이 즐겨 먹을 아삭한 고추씨를 뿌리러
밭으로 간다.
땅을 파헤치는 밭농사는 힘들어서 못하고 쉬운 화분농사만 짓겠다던 약속을
짓밟고 기어이 밭으로 간다.
화분 농사만 하시라고 목청 높여 나무라는 나를 못 본 척, 안 들리는 척,
가다가 몇 번씩 뒤돌아보며
따라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으며
내 손에 들린 소쿠리를 내어 놓으라고 앙탈을 부리며
기어이 밭으로 간다.
겨울 내 얼었다 녹은 흙을
호미로 깨고 긁고 뒤집어 비료도 뿌리고
고랑을 만들고 흙을 긁어모아 두둑을 쌓아 올린다.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쪼글쪼글한 손으로 아욱씨, 고추씨, 열무씨를 뿌린다.
씨 뿌려진 고랑에 살살 흙을 뿌려 덮는다.
갓난 아기 이불 덮어 다독거리던 손길 마냥 조심스럽고 부드럽다.
두 시간 동안 1미터짜리 이랑 10개
올봄농사가 끝났다.
봄이 오길 기다리며
매일 일기예보를 보며
언제 씨를 뿌릴까 노심초사하던 일이 끝났다.
어머니는 '이제 다했다' 선언했다.
하지만
새 싹이 나오면 또 다른 노동이 시작될 것이다.
매일 일기예보를 보며 언제 물을 줘야 할지
언제 솎아줘야 할지
벌레가 너무 무성해지지는 않는지
매일 3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네 발로 기어 밭으로 갈 것이다.
깊이 고개 숙이고 쪼그려 앉아 가슴 가득히 땅을 껴안고
씨를 뿌리고 키우는 노동으로
어머니의 행복이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