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등교육의 국제화 1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흔히 언급되는 볼로냐 대학에는 중세 유럽 전역에서 학생과 성직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국적과 출신을 넘어 법학과 신학을 함께 토론했고, 라틴어라는 공용어를 통해 하나의 학문 공동체를 형성했다. 제도화된 대학이라는 형식보다 앞서, 학문 그 자체가 사람들을 국경 너머로 이동시킨 것이다.
유럽에 볼로냐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당나라로 떠난 신라의 승려와 지식인들이 있었다. 통일신라 시기, 신라의 인재들은 불교와 율령, 경학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향했다. 제도화된 대학은 아니었지만, 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되던 곳으로 이동해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다시 자국 사회에 적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는 초기 형태의 학문 국제화라 할 수 있다. 볼로냐에 유럽 각지의 지식인이 모였듯, 신라의 지식인들 역시 당이라는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이동해 새로운 사상과 제도를 흡수하려 했다. 고등교육 국제화는 근대 이후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라, 학문이 지닌 본래적 속성에서 비롯된 오래된 움직임이었다.
근대 이후 세계의 대학 발전사를 보면, 대학 형성의 초기 단계에 있던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해외로 유학생을 보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과 일본은 독일로 유학생을 집중 파견했다. 훔볼트 대학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은 당시 근대 대학의 표준이었고, 연구와 교육의 결합, 박사학위 체계, 강좌제는 많은 나라로 확산되었다. 미국의 초기 학자들과 일본 메이지기의 엘리트들이 독일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대학이 스스로의 연구 역량을 갖추기 전까지, 가장 앞선 학문 체제를 향해 인재를 보내는 것은 거의 보편적인 선택이었다.
한국의 경우는 선진국들과는 다른 경로를 걸었다. 열강의 세력 경쟁 속에서 일본 식민지 시기를 거쳤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미국 주도의 국제 원조 체제를 경험하며 국가가 형성되었다. 산업 구조를 전환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상황에서, 한국의 인력 양성 방식은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직후 한국에 남아 있던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은 경성제국대학이었고, 이 대학의 제도적 모형은 식민지 대학으로서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일본 제국대학 체제에 속해 있었다. 일본 제국대학은 독일식 연구대학 모델을 수입해 만들어진 구조였기에, 형식적으로 보면 해방 직후 한국 대학은 이미 독일 학제를 간접적으로 계승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미군정의 시작과 전후 국제 원조 시기를 거치며 한국의 대학과 인재 양성 체제는 미국식 모델을 급속하게 수용하게 된다. 이는 한국 고등교육이 식민지 유산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한 채, 미국식 시스템을 빠르게 덧씌우는 압축적 전환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을 둘러싼 재편 과정은 곧바로 ‘식민지 잔재 청산’ 논쟁으로 이어졌다. 제국대학의 제도와 자산을 활용해 국립대학을 설립하는 방식이 과거를 온존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고등교육 인프라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기존 자산을 폐기하는 것은 국가 재건에 치명적이라는 현실론 역시 강했다. 그 결과 경성제국대학의 물적·제도적 토대 위에 1946년 미국식 종합대학 모델을 결합한 서울대학교가 탄생하게 된다.
미군정과 전후 원조 체제 속에서 교육 행정과 교과과정, 교원 양성 시스템은 빠르게 미국식으로 재편되었다. 교원 교육, 의학과 공학, 행정학 등 국가 운영에 시급한 분야에서 미국식 커리큘럼과 대학 운영 방식이 직접 이식되었고, 이는 한국 유학생들의 목적지가 독일이 아니라 미국으로 집중되는 구조적 배경이 되었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외국 유학생을 적극 지원할 여력이 없었던 반면, 미국은 원조와 연계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인재를 받아들였다.
1950년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국가 차원에서 해외 유학과 연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연구자와 학생, 연수생을 포함해 제1·2공화국 시기에 해외로 파견된 인원은 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유학생만 놓고 보더라도 약 5,000명 규모에 달했다. 외화가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정책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정부는 자비 유학 기준을 엄격히 설정했고, 공학 분야 유학생에 대해서는 병역 면제나 유예를 적용할 정도로 지원을 집중했다.
이러한 적극성의 배경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독보적인 유학 경험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수학한 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대 한국 사회에서 이와 같은 학력 경로는 유례를 찾기 어려웠으며, 미국에서 진행되던 고등교육 발전이 국가 발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체감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경험은 유학과 교육을 개인의 성취를 넘어 국가 재건의 핵심 수단으로 인식하게 한 배경 중 하나였다.
특히 원자력 분야 유학생 파견은 상징적인 사례다. 전후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과학기술로 여겨졌던 분야에 인재를 선제적으로 보내고, 이들을 귀국 후 연구기관과 대학에 배치한 선택은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인하공과대학 설립 역시 ‘한국의 MIT’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구상의 연장선에 있었다. 모든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해외 유학을 통해 양성된 인재들이 대학과 연구기관의 토대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고등교육 국제화는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선택지가 많지 않은 상황에 적응해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독립 이후 원조 자금을 활용해 매우 적극적인 해외 유학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산업화와 국가 건설을 떠받칠 인적 기반을 준비했지만, 동시에 미국을 거의 유일한 모델로 삼은 결과 학문과 연구의 지향이 특정 국가에 고착되는 한계도 남겼다. 한국 고등교육 국제화의 역사는 성공과 제약을 함께 지닌 선택의 기록이며, 오늘날 우리가 국제화를 다시 논의할 때 반드시 되짚어야 할 출발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