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이 펼쳐진 하얀 패드 위에 나만의 휴식 오마카세가 펼쳐진다. 내 느낌대로, 들려주고 싶은 그림을 구상하고 스케치하고 마침내 형태를 갖춰 당신에게 드릴 색으로 표현하고 나면 나만의 깊은 노동에도 마침내 휴식이 찾아온다. 그런 고민이 천이백 사일이 되었다. 처음 하루 한 장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는 하루 한 장이 가능하냐고, 일요일이나 주말은 쉬어야 하지 않냐는 물음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요일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때를 나누는 것은 타인과 어울려야 하는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조건일 뿐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에게는 그것이 권리요, 의무이자, 특권이 되며 완성과 더불어 비로소 오늘을 완성하는 휴식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벽부터 고민하고 그려온 그림이 비로소 완성되는 오후가 되면 마침내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 시간에 꽉 찬 시간이 주는 안온함이 좋다.
석촌호수 주변에 살다 보니 작고 아기자기하고 세련된 가게들을 매일 접하게 된다. 그중에서 요즘 가장 관심이 갔던 곳은 커피 오마카세였는데 6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바를 두고 바텐더처럼 손님이 고른 원두를 원하는 방식으로 내려주는 곳이었다. 특별하게 관심이 갔던 이유는 금요일 저녁 8시에 열리는 인원 한정 오마카세인데 어두운 거리 한편에 은은한 조명아래 소소하게 모인 몇몇이 늦은 커피를 음미하는 모습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겹쳐 보여 서다. 서늘한 밤그림자 앞에 각자의 그림자를 조용히 가늠하고 앉아 쓸쓸하게, 혹은 한없이 외로움을 머금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그 카페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차가운 밤만큼이나 쓴 커피의 깊은 향속에 앉아 와인처럼 잔을 돌려 그 속에 담긴 쓴맛과 단맛을 느껴보는 시간이 그려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궁금하던 곳을 오후에 일을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들러보았다. 인스타에서 제법 알려졌는지 한잔에 1만 원 정도하는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찾는 젊은이들이 제법 있었다. 비이커 같은 잔에 든 커피를 작은 유리잔에 절반정도 나눠서 먹으면서 와인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향을 음미한 후 마시는 커피였다. 처음 느낌은 '산뜻하다'였고 두 번째는 '깔끔하네'였다. 그러다 다음 잔으로 넘어갈 때쯤에 '단맛이 깊네'였고 네 번째 먹을 때는 '언제 다시 한번 와봐야겠군' 하는 마음이었다.
그림도 완성하고 며칠째 벼르고 있던 카페도 경험해 보면서 오늘의 나의 휴식 오마카세는 끝이 났다. 소소하고 작은 편린 같은 기쁨들이 결국엔 삶을 꽉 채우는 커다란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