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 불을 밝히다 보면

by 이혜연


살다 보면 그날이 그날인 경우가 있다. 바람도 없고, 먹구름도 없지만 어제와 비슷하고, 오늘도 평화로운 그런 날들. 감사하고 고마운 날들이지만 어쩐지 넓은 공터에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불 꺼진 방에서 자다가 밤인지 낮인지 모를 모호한 시간에 혼자서 깬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아무 일도 없어서 어떤 기분도 들지 않을 때 공명이 이는 마음에 꽃 한 송이 놓으며 불을 밝혀본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어쩌면 꽃 한 송이보다 그의 향기가 더 빠르게 내게 올 것이다. 그러면 싱그럽고 생생한 향이 무념의 존재에게 살아있는 날것의 냄새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어떤 날엔 부러 환하게 피어있는 꽃을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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