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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연 Dec 24. 2022

기억 창고

기억저편의 당신의 안부가 궁금해서

기억창고



당신이 집 앞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할 때

그때

돌아서며 잊었습니다


어느 저녁

붉게 물든 체념이

담벼락 끝에 걸려있는

골목 

모퉁이를 지날 때


돌아서며 잊었던

당신의 체취가

몹시도 그리워졌습니다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지 않아도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눈 위에 발자국 지우듯

쏟아져내린 폭설이

이제는 비어버린 고향집을 채울 때


대문 앞까지 배웅 나와줄 이

아무도 없는

그 빈집의 안부가

몹시도 궁금한

그런 날입니다






어제는 몇십 년 만의 강추위와 폭설로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었다고 해요.

오래간만에 뉴스를 보니 고향집 쪽에 눈이 엄청 많이 왔더라고요.

저 어렸을 때도 눈이 오는 날은 마당 한가득 눈이 쌓여서 학교 가려고

아침에 길을 내다보면 지붕 높이까지 쌓였던 게 기억납니다.

어렸을 땐 그런 날이 마냥 신났습니다.

눈을 쌓아 미끄럼도 만들고 눈밭에 동굴도 만들고 비닐포대에 지푸라기를 집어넣어서 신나게 썰매도 탔지요.

아빠가 만들어주신 나무 썰매는 골목에서도 냇가에서도 최고 인기였습니다.

한겨울 추위가 극심할 때 아빠가 만들어주신 토끼 귀마개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추억입니다.


그런 날들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고향집은 어쩌다 가는 곳이 되었죠.

처음 집을 떠난 날은 기쁨과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서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새 혼자가 편하게 된 날들에는

부모님이 자주 좀 내려오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갈길로 가던 어느 날 아빠가 먼저 돌아가시고 2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후 고향집은 홀로 남아 추억을 저장해두고 있습니다.

신기하게 어쩌다 고향집에 가면 예전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추운 겨울 방바닥에 배 깔고 엄마가 장에서 튀겨오신 튀밥을 먹던 일.

가위 바위해서 진 사람이 부뚜막에 있는 팥죽과 호박식혜를 가져와야 하는데 덜덜 떨며 마루를 지나 부엌에 가서 떠오다 문고리를 잡으면 쩍 붙어서 아팠던 일.

자려고 누우면 등은 따뜻한데 이상하게 입김이 후후 불어지던 일.

성인이 될 때까지 재래식 화장실이었던 화장실은 어렸을 때 공포의 대상이라 항상 엄마를 깨워서 볼일을 봤는데 눈이 오는 날 마당에 엄마를 세워놔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일까지.


이제는 비어버린 집에 대한 안부가 궁금해서 뉴스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비어있는 집이 마치 부모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당 한가득 눈이 쌓여있을 텐데 드나들 이 없으니 누군가 치워주지도 않겠지요.

집이 춥지는 않을까, 드나드는 이 없는 집이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나..


봄 햇살이 들면 집은 다시 마당 한가득 빛을 채우고

먼지 앉은 마루에는 바람을 들일 것입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를 들꽃들이 눈대신 마당 가득 피어날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추억이 된 집은 기억창고가 돼서 또다시 사계절을 살아내겠지요.

집도 나도 함께 늙어가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날들이 있으니

고향집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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