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만이 네 세상

by 이혜연
그것만이 내 세상

사과는

빨갛거나

초록이고

때론 벌레가 먹거나

반질반질 빛날 수도 있지만

사과는 그것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달콤하기도 하고

코끝을 살짝 찡그리는 신맛이기도 하고

아삭거리는 과즙이

입안에 팡 터지는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당신은

사과를 진정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만이 네 세상





9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에 다닌 나는 고등학교에 대해 아주 좋은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물론 어느 학교에나 성질 사납고 욕 잘하고 체벌 잘하는 그런 선생님이 한두 분은 꼭 있었지만 그런 분은 내게 '그런 분이 있었다'라는 한 줄 정도의 흐릿한 기억으로만 저장해두고 있다.

우리 학교는 신설된 여고였는데 명문 사립고를 지향하고 있었던 이사장님 덕에 동아리가 100개 정도 되었고 매주 토요일 동아리 활동을 꼭 해야 했다.

덕분에 수기도 배우고 지체장애자 돌봄도 했었다. 그때 당시에 수영과 승마동아리가 있었으니 한참 앞서갔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개를 더 했던 것 같은데 나에겐 두 가지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언어라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배웠기 때문에 그냥 말인 줄 알았지만 수기를 배우며 언어도 하나의 약속된 기호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어가 약속된 기호라는 건 그때의 나에게 충격이었다. 언어와 돈 같은 약속된 기호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경계 지어 서로 경쟁을 한다. 그건 넓은 들판 한 구석에 서로의 어깨를 엮어 작고 보잘것없는 울타리로 영역을 표시한 채 서로 싸우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울타리 밖에 광대한 평야는 내버려 둔 채 말이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던 나는 고등학교 때는 '인싸'와 '앗싸'를 오갔었다. 지루한 수업시간이나 잠이 올 것 같은 점심시간 이후 5교시 때 교단에 나와 노래를 불렀었다. 목소리가 허스키하고 커서 나른한 시간에 잠을 깨우기가 수월했고 그래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지루하면 노래를 시켰었다. 나는 항상 사양 안 하고 1반에서 6반까지 모두 들릴 정도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콩밭 메는 아낙네야~~~~~~~~!!!!"

그때 내 18번은 칠갑산이었다.

그렇게 노래할 때는 '인싸'였다가 평상시에는 옥상에서 하늘을 보고 누워있거나 학교 뒷산에서 낙엽을 주우며 생각에 잠기는 '앗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아들들도 첫째는 '인싸', 둘째는 '앗싸'기가 다분하다.


또 하나, 고등학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 무용시간이 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한 학기 동안 '나무'에 대해 생각하고 그걸 단체무용으로 그룹으로 짜서 표현하기와 독무로 내가 생각하는 '나무'를 춤으로 형상화해야 했다. 혹시 나무를 춤으로 형상화한다면 어떤 춤을 출 것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무에 대해 체계적이고 심도 있게 생각해 봤다. 너무 어지럽고 두서없는 나무들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정작 나는 나무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각할수록 어렵고 맥을 찾을 수없을 때는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나열해 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아이들 물놀이 장에서 차례를 기다려 에어볼에 들어가 노는 모습을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으면서 어쩌면 내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도 저 반투명한 에어볼처럼 내가 경계지은 것 안에서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무를 수없이 보고도 정작 나무를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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