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도 꽃향기는 있다

by 이혜연
비 오는 날에도 꽃향기는 있다


안개비가 잔뜩 내리는 날

세상이 어슴프레 잠겼다


비가 그치고

황금빛 달이 굵게 차오르면

내일모레가 한가위구나


예전 시골집 마당엔

노모의 손이 바삐 움직이며

고구마 키우고

고랑내서 씨알 굵은 감자도 거두고


마당 한편

볕 잘 드는 곳에

덕석 깔아 토란대 말리고

슬레트 지붕 위엔 새빨간 고추 꽃이

빨갛게 피었었지


노모 떠난 빈 마당

돌봐줄 손길 없이

해마다 덩굴 키우며

혼자 자라는

더덕 꽃 향기만

가득하다


오는 줄도 모르게

안개비는 세상에 꽉 차서

그림자도 없이 걷는 이의

머리를 적시고

어깨를 축축이 감싸는데


이제

어느 집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

젖은 몸을 말리려나



살면서 비를 만난다는 건 햇살이 가득한 날을 맞이하며 사는 것처럼 일상적이다.

부러 비를 맞은 날이 특별해지는 때가 있는데 아마도 우산이 없거나 나만 빗속에 서있는 느낌이 들 때가 그렇다. 하지만 길에서 스치는 어떤 인생에서든 비가 오고, 햇살이 찬란하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들이 있다.

다만 각자의 시간이 달라서 내가 비를 맞고 있을 때 다른 이들이 모처럼의 광합성을 하는 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성백제문화축제가 있던 지난 일요일 아침, 10시 40분에 올림픽공원에 도착했건만 그 전날 큰 애가 해보고 싶어 했던 집라인이며 암벽등반은 당일 예약이 꽉 차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도시락으로 싸간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하루 종일 신나게 놀이터에서 놀았다.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드는 저녁 7시까지 놀다가 그만 가자는 큰 애의 말에 돗자리를 정리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큰 애가 오늘 너무 재밌었지만 하고 싶었던 체험을 못해서 아쉬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해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하니 오늘 하루 조금 슬프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아쉬웠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못 가진 것만 바라본다면 어느 날인 듯 완벽한 날이 있을까? 내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큰 아이에게 말했다.


"살면서 못 가진 것을 자꾸 되새기며 아쉬워하다 보면

네가 가진 것, 네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이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어 보인단다.

네가 해보고 싶었던 집라인은 못했지만 새로운 친구들과 잡기놀이도 하며 재미있게 보냈잖니?

집라인을 못해서 아쉬운 날이 아니라 오늘 하루 함께 즐겁게 놀아준 친구들을 만난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루가 끝날 때는 항상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렴."


축제가 끝난 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전 01화노란 후드를 입은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