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

by 이혜연
오래된 친구

하얀 꽃잎처럼 내리는 눈은 공중에서 이미 녹아 없어지고 있지요. 바람이 차가운 날 손수 농사지은 상추며 대파, 시금치를 주겠다고 오래된 친구가 집 앞으로 왔습니다. 저도 제가 만든 티셔츠와 시골에서 사 온 곶감을 들고나갔지요. 우린 아이 기르는 시기가 달랐고 같은 서울이지만 거리가 멀었으며 친구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안부전화만 몇 년째 오갔습니다. 서울 끝자락까지의 거리가 어쩌면 지방보다 더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볼이 발그레하고 웃음이 예뻤던 스무 살 아가씨를 거리에서 찾습니다. 남들은 택도 없는 소리라고 비웃을 줄 모르지만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이의 얼굴에서 풋풋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신랑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근처 맛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봄눈이 바람에 덧없이 녹아내립니다. 우리 사는 이야기도 매 번 같은 이야기의 반복재생이지만 작은 쉼표와 표정으로도 서로의 깊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에 지는 겨울밤이 더욱 깊고 애잔해집니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파란 봉투에 가득 담긴 대파며 상추, 시금치를 들고 집으로 오는 길 뒤로 봄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느껴지는 눈 오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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