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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오후

by 이혜연
다정한 오후


나의 하루는 항상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라는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777일 전, 매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한 이후로 내게 그림은 그날 주어지는 사명과 같은 것이 되었다. 어느 날은 어제 찍어둔, 혹은 전날 자기 전에 생각해 둔 그림을 그리면서 수월하게 출발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여러날은 아무것도 그릴 것이 없어서 혼자서 두 시간 이상을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날들로 시작되곤 한다.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해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가 뭔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그걸 통해 무엇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첫날 이전에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며 수없이 많은 날들을 보냈었다.

그래서 내린 내 생각은 이렇다.


첫 번째는 앞으로의 인생 후반기에는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로 하루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살기 위해하는 일이 아닌 내가 살아있음을 노래하고 싶은 그런 일이 내겐 그림이었다.

두 번째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엄마의 유산이다.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을 해낼 때까지 나 스스로에게 어떤 여지도 주지 않고 묵묵히 완성해내는 일상을 살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분명 아이들도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세 번째는 다정한 오후를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신은 내게 아침을 주었지만 오후의 달콤함은 스스로가 오롯이 하루를 어떻게 채웠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해가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밤이 올 때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을 즐기며 살아내고 행복하게 밤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도 그림을 허투루 그려본 적은 없다. 그건 잘 그렸고 못 그렸다는 기준이 아니다. 나 스스로 최선을 다했느냐의 자기 반성이 기준이 된다. 그래서 새벽에 그림을 그리고서도 오후까지 계속 들여다보며 다시 수정을 할 곳이 없는지 살펴본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그 행보를 통해 발전하고 싶다.


그렇게 그림이 끝나는 오후가 되면 나는 오늘 하루도 알차게 살아냈다는 안도감에 쌓이게 된다.

그래서 내 그림은 오늘을 잘 살아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명함과 같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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