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급하게 집을 나서는데 친구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20대 때 친구와 함께 셋이서 자취(?)를 함께 했던 친구의 남편은 광주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가장 슬프고 힘들었을 때 만나 의지하고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사람이다. 한의대 밴드 동아리에서 베이스기타를 치며 공연도 하고, 사진도 잘 찍어서 공모전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글 솜씨도 좋아서 여러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기 때문에 못하는 게 뭘까 궁금했던 사람이다. 항상 무언가를 하면 상위권을 모두 차지했는데 인성도 그러해서 정말 배려심이 많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친구는 한의대 여학생회 회장과 밴드에서 키보드를 쳤고 친구 신랑은 베이스 기타를 쳤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려주었던 기억이 있다. 말이 거의 없던 친구와 헛소리를 잘하던 나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도 해주고 함께 살면서 서로 장난도 많이 쳤다. 주말이면 거실에 과자를 세팅해 두고 셋이서 뒹굴거리며 만화책도 함께 읽고 애니메이션도 많이 보며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어제 전화한 용건은 토요일 진료가 끝난 후, 전주 쪽으로 도시락 나눔 봉사를 하러 가다가 우리 고향 마을을 지나가다 생각나서 전화했다는 것이다. 30년 전에 와본 우리 고향집을 아직도 기억해줘서 감사했다. 친구는 시드니로 선교 강의를 하러 가서 월요일에나 온다고 했다. 도시락 나눔도, 선교 활동도, 단체나 교회에서 지원 없이 모두 자비로 하는 친구부부는 언제나 내게 넘사벽이다. 서로가 바쁘다 보니 일 년에 한 번 통화할까 말까 하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온 친구신랑의 전화가 더 특별했다. 통화 중에 나에게 더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고 나도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는 말로 아직 부족한 스스로를 슬며시 뒤로 감추며 말했다.
내 인생의 가장 암흑기에 만난 구세주 같은 친구 부부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눔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그런 따뜻함이 언제나 힘이 되고 이정표가 된다. 아직 그 친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나지만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쉬지 않는 친구부부의 가정이 지금보다 더 큰 축복을 받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