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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꽃소리

by 이혜연
빗소리, 꽃소리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들 없이 둘 만의 밤을 보냈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이 처음이라 우리 부부는 뭘 해야 할지 의왕 좌왕 의견이 분분할 뿐 쉽게 할 일을 정하지 못했다. 놀이터에서 아들 친구 엄마들이 '맥주를 마시러 가라, 영화관에 가라, 좋은 시간 보내라'라고 저마다 조언했지만 막상 주어진 꿈같은 시간에 우린 둘 다 너무 피곤했다. 신랑은 바쁜 일주일을 보낸 탓에 저녁 10시가 되기 전에 잠을 청했고 이대로 황금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아까운 나는 혼자서 오래간만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관까지 가는 건 귀찮아 집에서 최근에 핫했던 '파묘'를 보았다. 무섭다는 이야기가 많았었는데 개인적으론 어렸을 적 보았던 전설의 고향 '내 다리 내놔'편보다 무섭지 않았다.


어쩌면 아줌마가 되면 겁이 없어진다는 속설처럼 어렸을 적 대단한 겁쟁이였던 내가 아줌마가 되면서 나 혼자 레벨업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으스스한 영화를 무미건조하게 보고 나니 12시가 되어있었다. 아이들이 있었다면 9시 30분에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버렸을 것이다. 10년 만에 얻은 자유시간에 대한 미련은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뭘 할까, 뭘 하면 재미있을까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은 1시도 못 채우고 잠이 들고 말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자유시간이 주어져도 어떻게 누리는지 감을 잃어버린 나는 영화 한 편으로 귀한 시간을 모두 쏟아버렸다. 오래간만에 영화를 봐서 좋았지만 그래도 뭔가 더 재밌고, 더 기억에 남고, 뭔가 더 기념할 만한 일을 하고 싶었으나 까무룩 잠이 들어버려 아쉬움에 잠을 자다가도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6월의 아침, 소나기 소리에 잠이 깼다. 그렇게 짧은 휴가가 빗물에 우수수 씻겨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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